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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드골 공항은 조용했다. 오후 6시가 넘어서인지 더욱 그래보였다. 한숨도 안자 멍한 기분을 안고 여행의 시작점에 섰다.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향기를 맡았다. 파리의 커다란 손과 악수를 하는 기분이었다. 반갑다고, 오는 길 어땠냐고.


  입국심사는 간단했다. 드디어 여권에 스탬프가 하나 더 늘어나는구나. 무뚝뚝한 직원을 지나 짐을 찾고 인터넷에서 본대로 RER-B선부터 찾았다. Paris by Train이라는 안내판을 좇고 또 좇았다. 캐리어는 제 주인이 살짝 긴장했다는 것도 모르고 경쾌하게 굴렀다. 드르륵, 드르륵. 도대체 열차는 어디서 타는 거야? 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드디어 기차를 타는 곳이 보였다. 초행길이라 그랬을지 모른다. 그만큼 역과의 거리는 길게만 느껴졌다.

RER-B선을 타러 가는 길. 불어와 영어를 함께 써놓아서 고마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파리 시내로 가는 티켓을 샀다. 서투른 불어로 8.5유로를 계산한 뒤 한숨 돌리려는데 RER-B선이 벌써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일단 호텔에 들렀다 나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스피드가 생명이었다. 좁은 개찰구를 지나 드디어 그 '유명한' 파리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은 여행자로 보였다. 워낙 파리 지하철이 더럽다, 우리나라 지하철이 최고다, 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예상보단 훨씬 깨끗했다. 게다가 알록달록한 내부가 무채색뿐인 우리나라 지하철보다 오히려 이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솔직히 요즘은 지하철이 아니라 우주선 타는 것 같잖아. 뭐, 그런 생각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파리에서 기대 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릴 상품은..."이란 멘트는 없었다. 대신 아코디언 연주와 노랫소리가 있었다. 유명하지만 지금은 기억나질 않는 그 노래는 장시간 비행에 지친 몸을 낮게 두드렸다. 아저씨는 모두가 들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가 듣지 않는 노래를 스스럼없이 불렀다. 지하철 속 연주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듯 서로 다른 관심사에 골똘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파리에 왔음을 실감했다. 내가 사는 곳의 일상과 파리의 일상이 얼굴을 맞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공항에 막 도착한 관광객을 염두에 둔 공연이었을 것이다. 그것조차 파리에선 매일 같은 일이겠고.


  30여 분이 흘러 북역(Gare du Nord)에 도착했다. 여기서 4호선으로 갈아타 Strasbourg-St Denis역에서 내려 다시 8호선으로 환승, 호텔이 있는 Boucicaut역으로 가야한다. 북역에 내리자마자 인파에 휩쓸렸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지만 정신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훤칠한 키를 뽐내고 있었다. 거인국에 온 듯했다. 동양인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었다. 커다란 배낭과 캐리어 때문에 더욱 눈에 띄는 우리는 갑자기 무대 위로 내던져진 배우나 다름없었다. 사실 누구도 우리에게 신경을 쓰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다행스러운 건 지하철 환승은 방향만 잘 보면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쉽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많은 시간이라 수동식 개폐문을 여는 걸 앞사람이 다 해줘서 좀 아쉬웠달까. 중간 환승역인 Strasbourg-St Denis역은 북역보다 훨씬 사람이 적었고 우리는 무사히 8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한국의 버스처럼 앞을 보고 앉는다. 손잡이를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리니 사람이 타고 내리지 않을 땐 편안히 문에 기댈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출입문 양쪽에 있는 접이식 의자는 승객이 많지 않을 때 아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굳이 안쪽까지 갈 필요가 없고 앞쪽으로 짐을 놔둬도 될 만큼 공간도 넓으니까. 자리에 걸터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종은 달라도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표정은 어딜 가나 비슷한 것 같았다. 많은 얼굴에 고단했던 하루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우리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현대판 음유시인들을 만나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는 연주하고, 누군가는 발로 박자를 맞추는 풍경은 똑같은 케이크에 조금 더 높은 생크림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다 낭만적이었다. 항상 이어폰을 꽂고 디지털 음악을 듣는 것보다 때때로 이런 생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운인 걸까. 최소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조차 물건을 파는 외침에 눈살 찌푸릴 일은 없을 것이다.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표정은 어딜가나 비슷한 것 같다. 그들이나 우리나 하루를 마감할 때의 감정은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게 좋았다. 삶은 어디서든 이어지고, 어디서든 비슷한 가치를 지닌다.


  파리 지하철의 또 다른 장점은 속도감이다. 열차가 자주 오고 역과 역간의 거리도 짧아 이동시간이 길지 않다. 우리의 첫 목적지인 Boucicaut역까지 가는 데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호텔에 들렸다 나와야 했기 때문에 조급했던 마음을 여기 지하철이 잘 헤아려줬다고나 할까.
  Boucicaut 는 작은 역이었다. 좁은 개찰구와 매표소(인포메이션과 매표기 두 개만 달랑 있었다)를 지나 4번 출구로 올라오니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중심지에서 좀 벗어난 곳이라 그런지 행인도 많지 않았다. 길 건너로 보이는 카페만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왠지 부러움을 느끼며 호텔을 찾았다. 길을 잘 못 들어 뱅뱅 돌다가 드디어 우리가 묶을 호텔을 찾았다. All Seasons Paris Xv Lecourbe Hotel. 규모는 작고, 초록색 간판이 눈에 띄는 곳이었다. 체크인 후 나름 친절한 호텔 직원과 대화(?)를 한 뒤 일단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짐이 있는 두 사람이 겨우 탈만큼 좁았다. 외관도 크지 않고 엘리베이터도 작다보니 객실 크기 역시 대충 가늠이 됐다. 문을 열자마자 원색을 많이 쓴 인테리어가 반겨주었지만 역시 넓지는 않았다. 대충 짐을 풀고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밤이니 에펠탑을 갈까 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을 보러 가기로 했다. 웬지 눈치가 보이긴 했으나 호텔 로비에서 물병에 물을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람은 적응이 빠르다. 그래도 한 번 타봤다고 두 번째 타는 지하철은 친근하기까지 했다. 1회권 10장 묶음인 카르테(11.6유로)를 사서 드디어 본격적인 파리 관광을 시작했다. 개선문역(Arc de Triomphe)을 나서자마자 그 유명한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가 보였다. 조금 멀리서 바라본 개선문은 외관상 그렇게 감동적이진 않았다. 솔직히 (지금은 복원 중이지만) 남대문이 더 낫잖아!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리 특유의 노란 가로등 불빛에 젖은 모습은 셔터를 누르게 하기엔 충분했다. 기념사진 촬영 후 기념품점에 들려 개선문 사진이 박힌 엽서 한 장을 샀다. 그리고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Concorde 역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이 날, 개선문에 오르진 않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히 아름답다는 샹젤리제 거리. 한 달 늦게 온 탓으로 그 모습을 못 본 게 너무나 아쉬웠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감흥은 보통. 다양한 브랜드의 로드샵과 '유럽풍'이라고 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건물들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거리 자체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그곳의 사람들이었다. 파리 가이드북에서 '걸어 다니며 음식을 먹는 게 파리지앵이 되는 첫 걸음' 따위의 낯간지러운 문구를 자주 보았는데 나는 그 말을 정정해주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걸어 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게 파리지앵이 되는 첫 걸음'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파리 사람들은 담배를 사랑했다. '남녀노'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흡연을 즐겼다.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젊은 여성이 건물을 나서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한국에선 거리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도 '문화충격'에 한 몫 했다. 그러니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우리도 자연스레 한 개비 물고 불을 붙일 수밖에. 유럽에 금연구역이 늘고 있다지만 오히려 한국보다 흡연하기 좋은 곳이 아닌가 한다.

  그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건 카페테라스의 자리 구조였다. 한국에선 흔히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만 여기선 일행이 있어도 나란히 앉아 거리를 바라보는 게 일반적인 모양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커피와 음식, 와인을 즐기는 모습은 처음엔 생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여행자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만큼 파리를, 거리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도 없었다. 나의 동반자는 카페나 커피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덕분에 파리에선 카페에 엉덩이도 못 붙여 본 게 한이 된다. 또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처음 카페를 보며 받은 인상과 그 아쉬움 때문이다.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 구경, 거리 구경, 셔터는 끝없이 찰칵 거린다.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콩코드 광장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 30분 정도 걸렸을까. 시간은 거의 밤 10시에 가까워져 있었고 샹젤리제를 벗어나자마자 행인도 눈에 띄게 줄었다. 저녁을 지나 바로 새벽으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다리가 슬슬 아파올 무렵, 새하얗게 빛을 내는 커다란 관람차를 만났다. 파리는 밤이 되면 노랗게 물든다. 그곳에서 유독 커다랗고 유독 하얗게 빛나는 관람차는 어딜 가나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질적이진 않았다. 화려하지 않아도 은근히 마음을 적시는 파리의 야경에 찍힌 방점 같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그것은 광장 주변을 동화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여전히 얼떨떨하기만 하던 여행 첫날의 밤은 멍한 기분 속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PS.
  텔에 돌아와 때를 놓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짐을 무겁게 한 한국발 라면과 햇반이 메뉴. 컵라면은 인터넷에 본 팁대로 포장을 다 뜯어 면과 스프만 비닐팩에 담아왔다. 물론 물을 담을 락앤락 류의 통도 하나씩 챙겨왔다. 뜨거운 물은 로비에서 바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햇반이었다. 전자레인지도 없고, 햇반을 넣고 끓일 커피포트도 없어서 먹을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친척동생이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담고 햇반을 담궈두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게 될까 했지만 아예 못 먹는 것보단 낫기 때문에 15분 정도 기다려 보았다. 그 결과는? 한 입 넣어보자 설익은 것도 아니고 익은 것도 아니고 그냥 쌀 같으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이상한 밥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먹나, 먹고 탈나면 어떻게 하나 했지만 웬걸, 뜨거운 라면 국물에 말아먹으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이게 바로 파리에서 먹은 첫 음식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엽서를 쓰고 일정을 정리했다. 내일 첫 행선지는 루브르 박물관이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잠이 쏟아졌다. 소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파리의 조용한 밤 소리가 가득 찼다.


canon A-1
superia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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