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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가 날 깨웠을 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나흘 내내, 결국 홍콩의 아침을 본 적이 없다. 잠들기 전, 오전에 짬을 내서 어딜 다녀오자고 계획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고, 이제 와선 시간도 없었다. 출국 시각까진 그럭저럭 여유가 있었지만 지체하진 않기로 했다.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쓴 후 짐부터 정리했다.

  며칠 동안 신세를 졌던 호텔방엔 누군가 장기 체류를 하다가 막 떠난 현장처럼 질서와 어지러움이 공존했다. 수건은 매일 새로 (카트에서 우리 마음대로) 가져왔지만 룸 메이킹은 한 번도 받질 않았다. 방을 청소하는 시간 전에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사실 침대 시트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펴는 것 말곤 정리할 거리 자체가 없는 방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침대마저도 반은 캐리어 차지였으니 룸 메이드 입장에서나 우리 입장에서나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문고리를 걸어놓는 편이 서로 민망해지지 않는 최선이었다.

  그새 정이 든 아지트에 선물을 남겼다. 텅텅 빈 봄베이 사파이어 병과 한정판 케이스, D 2005년 판 여행안내서, 그리고 팁 삼일 치와 그 이자를 장식장에 올려뒀다. 특히 한정판 케이스는 디자인이 퍽 아름다워 방을 화사하게 꾸미는 데 한몫했다. 일 년 후에 이 방을 다시 찾아도 우리가 놔둔 자리 그대로 놓여있길 바란다.

  쓰레기를 치우고 그동안 마신 물병까지 모아봤는데 그게 한가득이었다. 물이 공짜인 점이 이 호텔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 따로 요청할 필요 없이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복도 한 편에 잔뜩 쌓아둔 배려가 고마웠다. 그나마 우리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물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체크아웃하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역으로 향했다. 어제까지와 달리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다. 도시는 변함없이 돌아가고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 또 하루를 보낼 텐데 우리에겐 후퇴라는 선택지밖에 없다. 여행지도 결국 누군가의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의 공간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런 앎 자체가 나의 기분을 낫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멋지게 포장을 해도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미련은 미련이다. 우리가 떠나도 홍콩은 변함없이 그대로겠지만, 우리가 인식해 왔던 이 도시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랍에 넣어두기로 한 편지처럼 기억의 구석으로 물러날 것이며, 다시 꺼냈을 땐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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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 첵랍콕 공항에 내려 도심으로 진입할수록 사람이 많아지는 걸 보았다. 이제 반대로 첵랍콕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적어지는 걸 본다. 썰렁한 라이 킹 역 플랫폼에 서서 벌써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한참 떨어져 나왔음을 느낀다. 그리고 자랑스레 고수했던 계획 없는 계획과 충동적인 선택이 칼 같이 짜인 시간표로 대체될 운명을 받아들였다. 내일부턴 다시 오전 여섯 시에 알람이 울리고 일곱 시 이십 분 열차에 타기 위해 뜀박질을 할 것이다. 정오가 되면 쓰린 위장을 달래기 위해 밥을 먹으러 가고, 한숨과 함께 퇴근 시간을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하루가 반복될 것이다. 여기 와서 많은 걸 놓고 가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더 많은 짐을 진 채 삐거덕거리는 몸만 추슬러 돌아간다. "곧 다시 올 거야." 그 말을 반복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쉴새 없이 종국을 향한 절차를 밟았다. 공항에도 쇼핑몰이 자리 잡은 걸 보며 지극히 홍콩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지 볼 것 없는 의류 매장을 둘러보다가 푸드코트에서 피자와 파스타 세트를 사 먹기도 했다. 면세점에선 나를 위해 봄베이 사파이어를, 기념품으로는 과자 몇 상자를 샀다. 그리고 마침내 커피 한 잔과 함께 창밖의 에이프런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공항 터미널에 감도는 착 깔린 소란스러움이 베이지색 에이프런 위에 정거해 있는 거대하고 정적인 기체와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곧 저 커다란 기계에 몸을 싣고 중력에 대한 저항에 동참할 것이다.





  , 볼펜 한 자루도 샀다. 여행 노트를 쓰려고 가져왔던 놈이 호텔방 어느 구석으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타서 인천 공항에 내리기 전까지 바로 그 볼펜으로 삼일 치 밀린 여행 노트를 몰아서 썼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어딜 갔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고, 어떤 판단과 어떤 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도 가물가물 했다. 기록되지 않은 결정적 순간은 대부분 사그라졌다. 허겁지겁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를 한 바닥에, 한 문단에, 그도 안 되면 한 문장 속에 쑤셔 넣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렇게 몰아서 노트를 한 건 처음이었다. 홍콩은 현실을 잊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지만 글을 쓰기엔 최악의 도시였나 보다. 아주 함축적인 단어 하나에서 그것이 내포하는 생생한 경험 전체를 되살려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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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즐겨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딘가 영혼이 이끌렸던 장소 하나쯤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줄기차게 여권에 도장을 찍어도 "그냥 어디 어디가 좋았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면 여행을 종용하는 수많은 책 중 한두 권이라도 빌려보기를 권한다. 서투른 표현이나마 당신의 여행을 정의할 수 있는 한 마디를 배울지도 모르니까.

  내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혼란스러운 거리를 마주했을 때, 홍콩만큼 빛의 속도로 나를 매료한 곳은 없었다. "놀 수 있을 만큼 놀고 온다."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도 그 덕분이다. 담배 네 갑 반. 봄베이 사파이어 일 리터와 다수의 진저 비어로 만들어 낸 셈할 수 없는 진 토닉. 마가리타와 모히토, 에너지 보드카 수여 잔. 거기에 맥주 두 병과 사케 한 병까지. 우리는 이 모든 이름을 기꺼이 기억할 것이며, 이번 여행은 그 즐거움과 동의어였다.


  

- 여행의 동반자 D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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