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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의 사진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바깥은 완벽히 어두워져 있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장어가 들어가 배는 든든하고, 이미 밤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여행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휴지기 - 붕 뜬 기분에 사로잡혀 생각도 행동도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 - 가 찾아올 때가 있다. 여행이 언제나 신선하고 흥미로운 건 아니다. 나와 D는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몸으로 침사추이의 골목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뭘 할까? 어딜 갈까?




  Y를 다시 만나기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남았다. 외국의 도시에서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조우하고 있는 Y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친구의 여자친구와 친구 여자친구의 친구들에 둘러싸여서(모두 홍콩 사람들이다.) 익숙한 대상이라곤 오직 친구 하나뿐인 상황은 동네 카페에서 벌어지더라도 만만치 않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장소조차 홍콩이라니.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조차 낯설어지진 않을까? Y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상상을 한다. 아니, 무엇보다 난 왜 지금 Y가 뭘 하고 있는지나 궁금해하고 있는 걸까?

  “잠깐 쉬자.”

  누구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와 D 둘 다 같은 생각이긴 했다. 우리는 미라마 쇼핑센터로 돌아가 그냥 거기앉아있기로했다. 와이파이도 잡히니까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가장 괜찮은 곳이 어디인지 검색이라도 해 보자.

  미라마의 거품처럼 생긴 의자에 앉았다. 나는 인터넷 검색을, D는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 지금은 시간을 때우는 게 유일한 목표고,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곤 전혀 없다. 배도 부르고 몸도 피곤하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앉아서 노는 거다. 그러니 이 글에서도 이 순간을 오래 묘사할 이유가 없다. , 이런 건 어떨까. 당시 우리가 하던 게 딴짓이었으니 여기서도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나는 D의 필름 카메라로 미라마 쇼핑센터 내부 이곳저곳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D의 카메라는 니콘 FM2, 그의 작은아버지께서 쓰시던 카메라다. D와 처음으로 팔라우에 갔을 때도 그랬고, 첫 번째 홍콩 여행 때도 그랬듯이, 나는 여행을 가면 항상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특히 첫 번째 홍콩 여행 때 찍은 내 필름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D가 자기 집 장롱 속에 있는 FM2를 떠올렸다. 사진 찍는 데 흥미가 없던 그이지만, ‘홍콩은 특별하니까 필름 카메라를 써보고 싶어졌단다. 사실 처음에 D FM2를 팔아 술값으로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매물로 내놓아도 팔리질 않자 안 팔리는 김에 한번 찍어나 보자고 해서 이렇게 들고 오게 된 것이다.

  홍콩으로 오기 전, D에게 카메라 조작 방법과 노출 원리를 간단히 설명해 줬다. 그리고 같이 필름을 샀다. 아주 오랜만에 필름을 장전한 FM2는 이번 여행 내내 D의 손안에서 찰칵거렸다. 오기 전날 마신 술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유난히 체력 고갈을 호소했던 이유는 사진 찍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거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일단 카메라는 무겁다. 그걸 계속 매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양손에 쥐고 한쪽 눈을 감아 초점과 노출을 맞추고 셔터를 감았다 풀고 하는 일은 한두 번이면 몰라도 누적되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중노동이 된다. 게다가 나와 D는 둘 다 수동으로 초점을 맞춰야 해서 디지털보다 두 배는 오래 걸린다. 풀 프레임의 DSLR에 망원 줌렌즈를 물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다양한 상황을 커버하며 좋은 품질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존경스럽다. 나도 한때는 화각이 다른 단렌즈 두 개에 똑딱이 디지털카메라까지 얹어서 들고 다닌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원래 쓰던 SLR도 웬만하면 챙기지 않고 필름 똑딱이로만(그래도 차마 필름은 버리지 못하고) 승부하려 한다. 차라리 볼펜을 자주 들어 메모를 많이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어쨌든 D는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진 상태다. 오히려 나보다 열심히 찍었고, 처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찍었다. 덧붙여 그 모든 사진의 사용권(?)을 나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기에 내가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D가 찍은 사진도 같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진짜 재능을 발휘한 분야는 스냅이나 풍경이 아니라 인물 사진이었다. 단언컨대 지금껏 내 사진을 찍은 사람 중 D만큼 잘 찍은 사람은 없다. 초상권 때문이라기보단(홍콩으로 떠나며 나는 선포했다. Y D, 너희의 초상권 따위는 없다고.) 신비주의(그러나 결국 누구의 얼굴도 공개하지 않았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의 일환으로 인물 사진은 붙이고 있진 않지만, 나는 아직도 D에게 놀라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중 하나.
photo by D


  무엇이 D로 하여금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떠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체력 방전 상태로 내몰리게 할 만큼 열심히 사진을 찍게 했을까. 첫째는 물론 사진 그 자체의 매력 때문이다. 디지털카메라에 익숙한 당신이라면 사진을 찍고 바로 확인할 수 없는 필름 카메라가 불편할 거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즉각적인 검열이 없으므로 사진을 찍는 게 재미있어진다. 피사체를 포착하고 셔터를 누르는 상황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다. 결과물을 보고 좌절하는 건 나중 일이다. 즐거운 여행 동안 재앙에 가까운 재능 때문에 우울해질 위험을 자초할 필요까지야 없지 않은가? D도 필름 카메라를 쓴 덕에 사진에 취미를 붙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또 아니다. 한편으론 두 번째 홍콩 여행도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욕구,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D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말 그 어느 것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길 바랐던 욕구도 무시할 순 없다. 사진에 취미를 붙인다고 인생이 급커브를 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티프, 동기, 새 페이지를 위한 소재가 될 가능성은 있다. 분야는 다르지만, 나와 Y 역시 이번 여행에 그런 시도가 있었다. 제 안에 가능태로 존재하는 역량을 찾고자 입으로 자욱한 안개를 불어내는 모든 안간힘은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마침 Y와 문자가 되기 시작한다. 땀 나는 저녁 식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미라마로 돌아오기로 했다. 몇 차례 얘기했던 대로 우리가 갈 곳은 이제 너츠포드 테라스였다.

 

 

:: 너츠포드 테라스


 

  불과 몇 시간 만에 훨씬 눅눅해진 거리를 걷는다. 정서적 습도의 원인은 술기운이다. 사람이 피부와 눈빛과 입김으로 쏟아내는 알코올 분자가 골목을 채우고 있다. 너츠포드 테라스는 밤의 시간으로 몰입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올 나잇 롱이란 바였다. 밤 열두 시에 즈음해 음악 소리가 커지며 분위기가 바뀐다는 이곳은 아직까진 평범한 술집의 모습으로 손님을 받고 있었다. 바도, 무대가 있는 작은 홀도 적정 인구수였고, 테라스는 오히려 빈자리가 많았다. 소문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그도 그럴 것이 아직 해피 아워일 만큼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는 바깥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둥글고 높은 원탁 위에 시원한 모히또를 올려놓고 우선 서로 헤어져 보냈던 저녁 시간을 나눈다. 나와 D는 장어 덮밥과 일본 맥주를 자랑했고, Y는 나와 D가 절대 손댈 수 없었을 홍콩 요리를 해치운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물론 저 자신도 만만치 않은 내상을 입었다고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곳이 올 나잇 롱이란 이름대로 흥겨운 파티장이 될지를 의심해 본다. 아무리 시간이 이르다고 하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멕시칸 요리를 파는 펍이나 작년에 나와 D가 물담배를 피우고 놀았던 메르하바가 손님이 더 많았다. 술집 안에 있는 무대도 썰렁한 게 의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얇은 셔츠 안으로 스며드는 축축하고 서늘한 바람! 낮에 빅버스를 타며 느꼈던 오한이 길을 되돌아온 듯 으슬으슬해 졌다. 이래서야 밤샘은커녕 열두 시 전에 앓아누울 판이었다. D Y는 나보단 나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밤거리를 뛰어다닐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작전상 후퇴, 호텔로 복귀해 갖는 재정비 시간이다. 만약 시간이 이른 거면, 그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필요없이 알맞은 타이밍에 돌아오면 그만이다. (사실 D Y는 올 나잇 롱의 변신에 굉장히 회의적인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 잔 딱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리는 얌전히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뜨거운 샤워도 하고, 냉랭한 밤 공기에 대응할 두꺼운 옷도 꺼냈다. 홍콩, 2월의 밤은 가을 재킷을 입으면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쌀쌀했다. 그리고 돈을 절약하기 위해 - 아직도 반이 훨씬 넘게 남은 드라이 진을 소모하기 위해 - 연거푸 진 토닉을 말아 마셨다. “취해서 나간다.”가 작전이었고, 우린 정말로 취해 버렸다. 적절한 때를 아는 사람처럼 적절한 취기를 감지했다. 앉은뱅이가 되어 호텔 바닥에 주저앉기 전, 여행 경비를 비싼 알코올에 퍼부으며 취하기만을 기도하는 어리석음의 이후.

  호텔과 밤거리의 이행부는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다. 우리는 툭 건드리면 웃음을 터트리는 소녀적인 상태로 돌아가 손잡이에 매달려 짧은 거리를 이동했다. 야우마테이와 침사추이는 제법 가까워 우리가 싸들고 온 취기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침사추이 골목을 돌아다닌다. 마음에 드는 펍이 있을까? 마음에 드는 이자카야는? 클럽은 어떨까? 그런데 어떤 게 클럽이지? 솔직히 잠시 머물다 가는 입장에서 주룽 반도엔 술집이 너무 적다. 그 밀도가 높은 곳은 란콰이퐁이지 여기는 아니다. 열두 시만 넘어가도 폐장을 준비하는 곳이 부지기수인데 취해서 온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 번 D Y에게 말했다. 차라리 아까 갔던 올 나잇 롱에 다시 가 보자고.



  D는 새로운 곳에 꽂히길 원했지만(예를 들어 첫 번째 여행에서 호텔 바로 앞에 있던 이자카야처럼), 더 걷기도 원하지 않았다. 우린 거의 스타의 거리까지 내려갔다가 너츠포드 테라스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올 나잇 롱 앞에 섰을 때 뭔가 달라졌음을 알았다. 야외에 있던 테이블은 모두 치워지고 사람들이 전부 매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불현듯 우리가 제때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실내로 들어가니 바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여기서 문 하나를 더 지나야 무대가 있는 작은 홀이 나온다. 닫힌 문틈으로 음악 소리가 새어나왔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홀 안엔 사람들의 뒤통수가 수도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가득 차 있던 것이다! 점원이 다가와 홀 안으로 들어가려면 술을 한 잔씩 시켜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술을 시키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고, 각자 칵테일을 하나씩 주문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앞 스테이지와 스테이지 양쪽 테이블 자리에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무대 위에는 임박한 공연을 예고하는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일단 지금 흐르는 음악은 힙합이다. 클럽은 아니되 늦은 시간이 되면 음량을 키우며 제 편한 대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출 수 있는 라운지 바와 비슷했다. 테이블과 카운터 쪽엔 아직 가만히 서서 술만 홀짝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버티고 버티다 마음을 흔드는 음악이 나오면 결국 어깨를 흔들기 시작해 리듬을 타곤 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골적으로 분주한 짝짓기도 없었다. 순수하게 술과 음악, 그리고 친구들과의 시간을 즐기러 온 이들뿐이었다. 그래, 이 정도가 딱 좋다.

  나나 D는 춤을 잘 추진 않지만, 안 추는 건 아니다.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즐기는 정도. Y의 춤은, 미안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객관적으로 말해 주자면, 드라마에서 중년 역할을 맡은 배우가 이 캐릭터는 아저씨라는 사실을 시청자에게 각인시켜 주기 위해 추는 그것과 비슷하다. 나름 귀엽다. 어차피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수치심을 느낄 일도 없거니와 그걸 느낄 정도로 썩 맑은 정신은 아니었던 우리는 각자의 가능성이 부르짖는 대로 음악에 자신을 풀었다. 이럴 때, 항상 박차를 가하는 건 떼로 몰려온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웃거나 환호하거나 손뼉을 치며 호응을 해 주다가 그 답례로 제 무리의 사진을 찍어주길 바라곤 한다. 거의 항상, 공식처럼. 기꺼이 그러겠노라며 사진을 찍어줄 때 나는 항상 궁금해진다. “쓰리, , 원이라고 해야 할까 원, , 쓰리라고 해야 할까? 꼭 끝엔 치즈를 붙여야 할까? 원래 하던 대로 둘까지만 세고 찍어도 될까? (주변 사람 사진을 찍을 때 난이외의 숫자만 센다. 하나 아니면 둘. 가끔 넷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말없이 찍어 욕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승자는 항상 나다. 아시겠지만 내가 쓰는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이며, 그들은 본인의 사진을 절대 검열할 수 없다.) 등등.

  그런데 올 나잇 롱의 진가는 클럽 음악에 있는 게 아니었다. 라이브 뮤직이었다. 썰렁하던 무대에 이목이 집중이 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 위에 밴드가 올라와 있었다. 동남아 사람들로 조직된 밴드였다. DJ가 관여하던 음악이 멈추자 그들의 연주가 홀을 지배했다. 클럽 같던 실내는 순식간에 록 콘서트장으로 바뀌었다. 소극적이던 관객들도 불이 붙었다. 보컬도 연주도 모두 훌륭해서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젊은 여성의 폭발적인 보컬도 뛰어났지만,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가릴 것 없이 모든 멤버가 온 힘으로 음악을 즐기고 있음을, 범종을 울리는 당목처럼 저돌적이고 일관된 그감정을 전이 받는 것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없다. 그들은 진지하게 연주하다가도 서로 눈이 마주칠 때면 어린아이 마냥 표정이 풀렸다. 관객에 대한 매너는 지키면서 지금 누구보다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확인이라도 하듯 말이다. 나는 그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에겐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몇 시간이, 수십 명의 관객이 보증하는 몇 시간이 있다. 나도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나눠 받고자 손을 들고 힘껏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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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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