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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광욕이라든가 광합성이라든가 전부 여름 햇살 아래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나는 피부가 검고, 여기서 삽시간에 더 시커메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땡볕을 피하는 편이다. 누가 그 무자비한 레이저를 좋아하겠느냐만은 난 보통보다 유난스럽기는 하다. 그러니 태양의 무게가 훨씬 무거운 지역으로 여행을 오면 매일 아침 창밖을 보며 저 햇살 아래로 나가야만 하는가 회의에 빠지곤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외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결국 챙 있는 모자를 찾거나 선 블록 크림을 보다 꼼꼼하게 바름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거리에 야자수가 자랄 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모든 조치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고야 말지만.





  B의 집은 거의 리조트를 방불케 했다. 복도에서 하얀 쓰레기 봉지를 보고 순간 방을 정리하기 위해 수건과 비품을 싣고 다니는 카트를 떠올렸을 정도다. 회사에서 지원을 해줬다고 들었는데 해외 파견 생활의 장점이 무엇인지 똑똑히 목격한 기분이었다.





  건물 앞 정원의 야자수도 제 존재가 어떤 일광 조건의 결과물인지 기억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아스팔트에 신발 밑창이 눌어붙을 듯한 양지가 보였다. 게다가 큰 공사가 진행 중인지 곳곳에 서식하고 있는 크레인을 보면 더위가 한층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허물고 밀고 세우기에 바쁜 도시가 여기 또 하나 있었구나.

  가끔 유난히 낡은 건물이나 층수가 낮은데 면적이 넓은 건물을 보면 왜 재개발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자꾸 멀쩡한 걸 부수고 높은 걸 세우나 했는데, 주범이 멀리 있지 않았다. 아무리 태양이 싫어도 그렇게 그늘을 만들고 싶진 않다.





  메트로 뱅크가街에 있었던 B의 레지던스. 이젠 그도 한국으로 아예 들어왔다.





  같이 산책하던 D의 발걸음은 가볍다. 어떤 관점에선 그는 보무당당하다. 나는 아침 햇살 한 번 오지게 뜨겁다며 경악에 경악을 반복하고 있었건만.





  그러나 나만 태양이 부담스러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현지인이 햇살을 피하는 방법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산을 쓰고 다니는 거였다. 양산도 아닌 시커먼 우산을 쓰고 맑은 날에 돌아다니는 덴 그리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는 체면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하늘과 구름의 형색이 자외선 피폭에 그나마 위로가 된다. 용도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창고가 용이 고개를 든 모양새의 구름과 퍽 잘 어울리지 않는가.





  마닐라에서 찍은 사진은 대비와 채도를 높이고 여름날 태양이 그러는 것처럼 윤곽선 하나하나를 쨍하게 보정해야 제맛이다. 아니, 절로 사진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과장된 이미지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도시를 표현하기엔 아주 적절하다.





  걷다 보면 남국 태양 아래서의 산책에 유익한 면도 있음을 깨닫는다. 그 이득은 빛과 그림자가 이 세상에 어떻게 드리워지는지, 그것을 만든 존재에 따라 그늘의 질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바람이 유달리 선호하는 그늘은 어떤 곳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D는 어디를,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매 순간 잊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 이런 원초적인 빛깔로 건물을 통째로 칠해 버리는 거, 바로 그런 류의 심미안을 기대했어. 햇살과 바람에 탈색된 몇 년 후의 이곳은 오늘보다 더 아름다울 거야.





  자동차 조립 공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도요타 대리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느 순간 전날 마신 알코올이 햇살에 증발이라도 하는지 어지러워졌다. 커피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마침 스타벅스가 있어 구경도 할 겸 찾았다.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얼음이 많이 들어있지 않았고, 그마저도 밖으로 들고 나오자 금세 녹아 없어졌다. 커피 맛은, 글쎄, 비슷했다.





  나는 저 보온병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아마 남자의 음료가 채워져 있겠지. 설마 벤티 사이즈 두 잔을 주문해 담아 둔 그의 텀블러인 걸까.





  업장이 아직 반도 들어오지 않은 신축 아케이드도 지났다. 주변이 굉장히 썰렁하고 행인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가 북적거릴 날이 과연 오게 될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카메라로 겨냥하자 그는 신 나게 손을 흔들었다. 넘치는 빛과 은근한 숙취 때문에 정신없는 산책이었지만, 반갑게 호응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움이었다. 남자는 꽤나 높은 곳에 매달려서도 여유가 있었다. 이 햇살을 오랫동안 받다 보면 그처럼 천진난만해 질 수 있을까 나는 팔을 그늘 밖으로 빼 태양 아래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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