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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 말, 삿포로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늦은 휴가 목적지로 염두에 두고 있던 곳은 원래 교토였다. 하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삿포로 왕복 항공권이 올라와 있는 걸 보고, 게다가 딱 네 장 남아 있는 걸 보고, 예약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였다. 실은 이 가격일 만한 시기인 것이다. 가이드북에서 홋카이도 추천 여행시기로 일 년 중 아홉 달을 꼽았는데 11월은 나머지 불운한 석 달 중 하나다. 단풍은 지나갔고 눈은 잘 오지 않는 어중간한 달. 삿포로 시내 호텔 가격이 서울 모텔 가격보다 싼 걸 보면 말 다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겐 최적의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도시엔 분명 사람을 유혹하는 면이 있다. 한산하다 못해 허전한 거리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걷고 싶어지지 않겠나. 게다가 오랜만에 동행도 없다.
 저렴한 비행기 표가 당위까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사실 일본에서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이 홋카이도였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려 발 들기도 힘들고, 아가일 무늬에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쓰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은 북구의 섬. 그런 바람을 불어넣은 장본인은 이병률 시인이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의 저자 소개에서 시인은 “삿포로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넘치는 사람”이라고 설명된다. 베네치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 준 책도 그의 전작 여행기인 『끌림』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사람, 나의 여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여러 에피소드 중 특히 눈이 많이 내린 날을 묘사하는 에피소드가 좋았다는 이유도 있다. (정작 그가 삿포로에 관해 쓴 글은 두 권 통틀어 한 편뿐이고, 그가 눈을 많이 맞은 일본의 도시는 센다이였다.) “눈이 많이 내려 그곳에 갇혀도 좋겠다.” 단 한 줄로 적힌 그의 문장은 나를 폭설로 교통 두절된 도시의 이미지에 가두어 버렸다. 근래 눈이 많이 내려 거기에 파묻히면 좋을 기분이었으니 혼자 떠나는 이 마당에 혹시 그럴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은 섬으로, 그 섬의 알코올 냄새 나는 이름을 가진 도시로 떠나고 싶었던 셈이다. 생전 처음 가는 도시에서 함박눈을 맞을 수만 있다면, 아, 완전히 눈사람이 돼버릴 수 있다면.
 그러나 몇 번 안 되는 여행 중에 이미 그런 경험을 해 본 적 있는 사람이다, 난.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 결국 감정 탓에 품어버린 환상이오, 환상은 환상일 뿐. 이미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그러니 그냥 잔말 말고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겨울옷 때문에 상온에 놔둔 우유갑처럼 부푼 가방을 질질 끌고서 말이다.
 그리하여 삿포로에 다녀왔다. 그냥은 아니고, 삿포로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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