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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깊었고, 나는 취하고 싶었다. 이 도시에서 멋지게 취하는 것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스스키노 거리에 갔다. 가장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라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술집을 찾아 들어가는 데는 홀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제대로 변명하자면 스스키노에는 혼자 취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앞을 가로막았고, 뒷골목에서는 여자(때로는 남자)와의 시간을 사라고 권하는 호객꾼과 인쇄물이 건물 입구마다 서성거렸다. 종종 괜찮은 술집 내부 사진이 벽에 걸려있기도 했는데 전부 건물 상층에 있었다.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위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모든 종업원이 버니걸 복장으로 서빙하는 어느 맥줏집 앞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맥주 한잔 한다면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늘어놓을 화끈한 이야기 하나쯤은 생길 것 같았지만, 나는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체면치레를 하는 인간이다. 들뜬 근육질 남자들이 버섯처럼 들어앉아서 빈자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돌아온 곳이 숙소 앞이었다. 다누키코지 6쵸메엔 TK6라는 바가 있다. 입구 앞에 세워둔 간판에 삿포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터내셔널 바’라고 쓰여있었는데, 과장은 아닌지 어제부터 이 앞을 오가며 다양한 인종이 들락날락하는 걸 봤었다. 여기서 가볍게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 어제 편의점에서 산 니카 위스키나 마무리하자는 심정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자그마한 홀을 가로질러 카운터 자리에 앉자마자 생각이 달라졌다. 혼자서 멋지게 취할 곳이 없을 리 없었다. 불야성의 거리엔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뒷골목엔 이렇게 버젓이 존재했다.















 진열장에는 그대로 쓸어담아 내 방으로 옮기고 싶은 온갖 종류의 술병이 늘어서 있었고, 머리 위로는 팝 음악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고 신 나는 곡들이 쏟아졌다. 일하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바 안에서는 주인으로 보이는 사십 대 여자와 아르바이트생인 이십 대 여자가 생맥주를 따르고 칵테일을 만들었고, 주방 안에선 검은색 티셔츠 유니폼을 입은 남자 혼자 손님이 시키는 모든 안주를 다 만들고 있었다.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대화 소리에 음악 소리가 엉켜 실내는 아주 소란스러웠다. 맥주 몇 잔에 취한 미국인들 목소리가 제일 컸지만, 일행과 뭔가를 논하거나 나처럼 혼자 와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본인들 역시 그에 뒤지진 않았다. 일본 사람들은 조용하다는 편견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아니, 술을 마실 때도 조용할 거라는 착각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분명 여기는 다른 곳과 분위기가 달랐다. 부담스러운 친절도 없었고, 오너나 직원은 우리를 모셔야 할 손님이 아니라 이런 장소에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데 감사해야 할 대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한 가지 실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엔 마음이 상하기도 했었다. 바 안 이곳저곳을 찍다가 홀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는데 다른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말라고 제지당했던 것이다. 그들이 의식하지 못할 때 찍으면 예의가 아니며, 나중에 그들과 친해지면 그때 동의를 구하고 즐겁게 사진을 찍으라고 오너는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이 전부 옳았다. 나는 잔을 흔들어 얼음을 녹이며 내 부주의를 곱씹었다. 순간을 기록하는 데 익숙한 난 이런 간단한 기본을 무시할 때도 있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 욕구와 취미가 어떤 사람들에겐 불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다스릴 수는 없었다. 죄책감 비슷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안하기도 했다.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그 느낌에 신경이 쏠렸다. 나는 술잔을 여러 번 비우고 이런저런 소회를 노트에 털어놓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부끄럽다고 자리를 뜨기에는 이곳에서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바는 카페만큼이나 혼자 가기에 좋은 곳이지만, ‘혼자’라는 사실을 보다 절실하게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처럼 사람이 많고 시끌시끌한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유가 뭘까? 커피는 혼자 즐기고 술은 다 같이 즐기는 데 익숙하기 때문일까? 들어올 땐 혼자였지만, 주인이든 다른 손님이든 다른 이와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이들이 보였기 때문일까? 대화 상대로 간택 받지 못함에 초라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난? 몸속으로 술이 들어오는 만큼 만년필에선 잉크가 흘러나와 점점 더 긴 글로 노트를 적셨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하릴없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한편으론 내가 아는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오면 그 시간이 얼마나 달콤할까 상상하면서. 우리의 즐거움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텐데 자신하면서.
 “뭘 그렇게 써요?” 반전은 오너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됐다. “일기예요.” 그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다음 순간엔 종이에 물이 들듯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술집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아까 사진 찍는 걸 막은 일을 사과하며 잘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불편한 앙금이 가셨다. 그렇지 않다고, 내 실수가 맞았다고 웃으며 말하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다른 손님이 사 준 맥주잔을 들어 나와 건배했다.
 그리고 내 옆에 한 남자가 앉았다. 수염은 길렀지만 얼굴은 어려 보이는, 스물여섯 살의 류였다. 그와 어쩌다 대화를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진 토닉을 마시던 나는 그를 따라 삿포로 클래식 맥주로 주종을 바꿨다. 처음엔 기혼자라는 데 놀랐다. 결혼한 지는 일 년이 조금 넘었고 부인이 연상이라고 했다. 그는 마일드세븐에서 이름이 바뀐 뫼비우스를 피웠고, 맥주를 좋아하며, 한국 연예인 중 김태희를 무척 좋아했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예쁘다고도 했다. 나도 좋아하는 일본 배우나 가수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얼마 되지도 않는 데다가 전부 남자라 그를 감탄시킬 방도가 없었다. “서울은 어떤 곳이야?” “크고 바쁘고 혼잡해. 낮에는 다들 일을 하고, 밤에는 새벽까지 술을 마셔.” 삿포로가 밤 열 시만 돼도 침묵에 잠기는 도시라는 건 어제와 오늘 이틀로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도시의 이미지는 확연히 대조적이었다. “번화가가 많아?” “대여섯 곳은 되지. 우린 정말 술을 좋아해. 미친 듯이 마시고 춤을 추지.” 서울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심어줬다고 욕하진 마시길. 이미 얼큰하게 취한 우리 사이엔 과장된 대화가 필요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물었다. “부인이 이 시각까지 술 마시면 뭐라고 안 해?” “장난 아니지. 지금도 계속 어디냐고 문자가 오고 있어.” 우린 웃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어딜 가나 마누라 바가지는 다르지 않다고 우리는 웃었다.
 중간마다 오너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대화에 참여했고, 술잔은 끊임없이 비워지고 채워졌다. 나는 새벽 한 시가 넘어 방으로 돌아왔다. 쌀쌀한 바람을 맞고 싶어서 그 블록을 한 바퀴 돌다가 들어갔다. 오늘은 유난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만난 르 카페의 주인아저씨도 그랬고, TK6의 오너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유부남 류도 그랬다. 맥주를 마시며 모니터의 축구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일본어를 잘하던 뉴질랜드 남자도, 그래, 좀 건방져 보였지만 거기에 끼워줘도 되겠다. 이 도시에 오길 잘했다. 이 도시에서 오래 체류하며 매일 카페에 가고 주에 한 번은 바에 들러 조금씩 늘어가는 일본어 실력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 정말 너무 많이 마셨다.

 다음 날 계산해 보니 바에서 무려 4,400엔어치의 술을 마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








Canon EOS-M + 22mm / 50mm

iPhone 5



TK6 Bar & Grill
6 Chome-6-5-3 Minami 2 Jonishi
Chuo Ward, Sapporo, Hokkaido Prefecture 060-0062

http://tk6.jp/





댓글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5.03.01 19:18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안녕하세요?
    방문 감사합니다^^ eos-m이 인연이 되었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세요~ ㅎㅎ
    2015.03.02 00:08 신고
  • 프로필사진 Kkk 작가님! 네이버포스트로만 읽다가 글이 너무 좋아서 여기도 들어와봤는데, 여긴 좀오래된 글들도 가득하네요- 주말내내 작가님 여러글들 읽고 뭔가 좀 말랑말랑한 마음이 된것 같아요!
    3월의 시작을 기분좋게 할 수 있을것 같은 느낌예요 . 비록 오늘밤 잠은 잘 안 올 것 같지만..ㅋㅋ
    작가님도 굳밤 되세요 :)
    2015.03.02 00:40 신고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안녕하세요?
    앗 네이버포스트에서 보고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요렇게 찾아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좋네요^^

    댓글이 늦긴 했지만, 좋은 하루 되시고 자주 놀라와 주세요^^
    2015.03.05 11:43 신고
  • 프로필사진 Kkk ㅠㅠ잘못눌러서 두개가 써졋는데.. 댓글 삭제가잘안되네요... 죄송해요....ㅋㅋㅋ 2015.03.02 00:44 신고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ㅎㅎ 하나는 삭제했습니^^ 2015.03.05 11:44 신고
  • 프로필사진 좀좀이 4400엔 어치 술...정말 많이 드셨군요. 어느 나라든 밤 늦게까지 술 마시면 아내가 싫어하는 건 공통이로군요^^ 2015.03.03 23:34 신고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계산해 보니 한두 잔이 아니더라구요. 덕분에 숙취가 있었습니다...

    그러게요 ㅋㅋ 어느 나라든 공통인가 봅니다 ㅎㅎ
    2015.03.05 11:44 신고
  • 프로필사진 voyage0207 맙소사, 여행기 내도 될 것 같아! 포스팅 하나하나 읽다보면 책 읽는 것만큼 시간이 훌쩍 지나가있네 :) 2015.10.23 12:30 신고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티스토리도 하고 있었네! 반갑습니다. 종종 놀러와서 읽어주세요 ㅎㅎ 2015.11.02 22: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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