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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정신에 세게 몇 대 얻어맞으면서도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연수,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밀란 쿤데라.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다른 작가와 시인, 여행가들도 모두.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읽은 책이 적을수록 - 두 번 이상 읽은 책들은 목록에 넣지 않지만 - 그해에 관한 기억이 희미하고 길이도 더 짧게 느껴진다고. 마치 시간을 엄청나게 손해 보거나 허망하게 흘려보낸 거 같다고. 독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시간을 써버리는 나의 버릇을 교정해 준다. 나의 덧없는 시간을 확장해 준다. 열세 번째 월급이라는 연말정산에 목숨 걸 필요가 없었다. 한 권 한 권이 여덟 번째 요일, 서른두 번째 날, 열셋, 열네 번째 달이었으니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을 벌지 않았나. 책을 읽으며 등장인물의 일생을 함께 살고 저자가 오랫동안 고민하며 일궈 온 지혜를 맛볼 수 있으니 이는 과장 축에도 끼지 못한다. 추운 겨울날, 나는 보리수나무 향이 섞여든 봄바람을 맞으며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기억될 사랑을 나누는 연인을 숨죽여 지켜보기도 했다. 어쩌면 독서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미경 속에서 진짜 현실을 살아가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유난히 빨리 지나간 어떤 해를 떠올리면 나는 마음가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다. 독서가 어렵고 뜸해진다면 그건 내가 뭔가를 제대로 생각하거나 쓰고 있지 않다는 신호였고, 그건 거듭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 불길하게 깜빡였다.
 삿포로에 갈 때, 그 짧은 삼박사일 동안 책을 읽겠다며 김연수 작가의 수필을 챙겼다. 『소설가의 일』. 제목부터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인터넷상에서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이라 이모티콘과 자음 웃음까지 그대로 들어가 있지만, 형식이야 어찌 됐든 나는 많은 걸 읽어냈다. 그곳에 많은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슬쩍 커닝해야 할 소설가의 성질, 태도, 작법, 그리고 그 와중에 잊지 않아야 할 위트까지. 예상보다 많은 분량을 여행 중에 읽었다. 여러 페이지를 다시 읽으려고 접어두었다. 심지어 내 나약한 기질에 대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덕분에 여행 기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고는 말 못 하겠다. 대체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카페나 바에 앉아서 읽었기 때문에 여행 중 포착해야 할 장면을 여럿 놓쳤다고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창밖으로 흐르는 낯선 풍경이라든가, 머무는 자와 스쳐지나가는 자의 표정, 옷차림, 말투라든가, 토막토막 알아들을 수 있는 정체 모를 이방인의 속내라든가. 기회비용이라는 말을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풀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그런 문장을 쓰고 싶은데. 사람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 아니, 영혼을 다해야 할 일이라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기회비용은 어쩐지 손해를 보는 뉘앙스를 풍기고, 포기라는 말로 해석해야 할 비관적인 단어로 보인다. 난 무엇을 포기한 게 아니다. 선택했을 뿐이다. 예컨대 오타루로 가는 길엔 등 뒤로 뻗어 나가던 바다의 시퍼런 빛을 책에 비추어 읽었고, 전차에 실려가던 길엔 거의 정지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느긋하던 시가지의 움직임을 문장 읽는 속도에 반영했다. 좋은 책이라면 내 방 침대 위에서 읽든 노면전차에 앉아서 읽든 그 가치가 변할 리 없다. 하지만 가치는 변하지 않을지언정 그걸 받아들이는 나는 한결같지 않은 불안정한 피조물이다. 아마 당시의 난 무엇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책 속의 세계를, 이 세계 속의 책을 한 덩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파도의 가장 높은 등성이를 타고 미끄러지듯 유쾌한 기분을 안고 말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주인공이 마차에서 만난 한 철학자는 정치적 성향을 묻는 동료의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한다.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고, 좋은 책 한 권이 내게는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것, 나의 정치란 그런 것일 뿐일세.” 나는 그냥 지나가는 인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결국 저자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그의 말에 이마를 탁 치고 만다.


Canon EOS-M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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