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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기로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맛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이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내가 삿포로에 와서 봤던 모든 곳 중 가장 ‘관광지’답긴 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전 일정 중 가장 공허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불명예의 자리엔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가 올랐다.)
 유명한 맥주 박물관이라고 해서 주변 주택가와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공원 내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었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벌써 시 외곽에 닿은 듯했다.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마트도 그런 인상을 북돋웠던 것 같다. 차도가 주차장과 박물관 옆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 근처에 벤치가 하나 있길래 거기서 잠시 숨을 돌렸다. 거의 쭈그린 거나 다름없는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어떤 남자 옆에 앉아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늘이 걷히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듯 네모나게 잘린 햇살이 발밑에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날이 개고 있었다.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회색 구름은 먼 곳으로 물러갔다. 달라진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약간 습한 몸을 따뜻한 햇볕에 말리자 뭐가 있든 박물관 안을 둘러보고 맥주도 한 잔 마실 수 있겠다며 힘이 생겼다.












 군청색 유니폼을 입은 안내원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방문자를 환영했다. 그녀는 곧바로 내 국적을 알아내고 용지에 인쇄된 한국어 안내문을 건네줬다. 앞으로 전시물 옆에서 읽게 될 모든 일본어 설명에 대한 해설이었다. 19세기 중반, 그러니까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북해도 개발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맥주 사업을 벌였다는 설명을 시작으로 일본 맥주 회사의 연대기, 맥주 원료와 제조 공정 대한 소개, 자사 맥주 브랜드 종류, 그리고 관람 순서를 일러주는 평면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A4 두 장 안에 깔끔하게 들어있었다. 나는 이 압축의 미에 더 매료됐는데, 실은 주의 깊게 전시물과 설명서를 번갈아 봐도 내가 지금 무엇을 감상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상적인 전시물 두 가지를 꼽자면 맥주 제조 과정 전체를 아기자기하게 옮겨놓은 모형과 메이지 시대부터 쓰인 맥주 광고 포스터였다.
 효모의 요정이라도 되는 것 같은 고깔모자를 쓴 작은 인형들이 열심히 맥주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코올이 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지에 대한 가장 엉뚱한 이유를 찾아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모형은 꼬물꼬물 움직이기까지 했다.) 이런 작고 세밀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데 능한 일본인들의 재주에 다시 한 번 감탄하기도 했다. 정작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할 아이들이 맥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나 역시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까 제작자가 의도한 바는 충분히 이뤄진 셈일 것이다.
 반대로 삿포로 맥주의 광고 포스터는 성인에게 알코올을 팔아치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확인시켜 줬다. 일러스트 시대부터 사진 시대에 이르기까지 포스터 대부분에 맥주잔을 든 매혹적인 여성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시절 가장 유행하던 의복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주목받았던 미인상을 한눈에 보는 기분이었다. 초기에는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상류층 여성이 주를 이루다가 세월이 흘러 배우의 사진이 포스터에 등장하면서 남자가 더 자주 보이기 시작했고, 더불어 분위기도 더 가벼워지거나 유머러스해졌다. 맥주 광고 포스터를 한 곳에 몰아놨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 저 맥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시관 전체를 설렁설렁 돌아다녔던 것과 달리 박물관에서 나올 때쯤엔 꽤 열렬한 삿포로 맥주의 팬이 되어 있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일본 맥주를 살 때도 삿포로 맥주를 골라본 적이 없는데 이젠 그것만 고르고, 가끔은 이자카야에서 생맥주로 마시기도 한다. 달리 원인을 찾을 필요도 없다. 거의 백오십 년에 걸친 광고에 한번에 노출되었으니, 머릿속 어딘가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었을 테니까 말이다.






























 관람을 마치고 드디어 일 층 시음장으로 내려와서 클래식 생맥주를 한 잔 마셨다. 가격은 고작 200엔이었다. 시내 식당에서 파는 가격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값이다. 원래 여기서 파는 세 가지 생맥주를 모두 맛볼 수 있는 500엔짜리 세트를 선택하려고 했지만, 그건 지금 상태에 도저히 안 될 말이었다. 한 잔을 사면 한 봉지를 공짜로 주는 크래커를 씹으며 시음장을 둘러보았다. 대형 화면에선 티브이 광고가 쉴 틈 없이 흘러나왔고, 한 여자는 - 한국인이었다. - 맥주 대신 음료수를 마시며 여행 안내책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물관 답게 기념품 코너가 있었지만, 바 안에선 안내원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여성들이 맥주를 따르고 있기도 했다. 박물관도 아니고 술집도 아닌 복잡한 분위기였다.
 맥주 한두 모금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그러자 환영처럼 일본 남자 여럿이 나타나 단체석을 점거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봐, 오후 한 시밖에 안 됐다고. 게다가 평일 낮인데? 그러나 맥주 세 잔 세트를 머릿수 대로 시키는 광경에서 그들이 요일과 시간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람객인지 주변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맥주를 들이키고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으로 감탄하는 광고 속 배우를 그들은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나도 술을 꽤 좋아한다고 자부했으나 그들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았다. 맥주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는 것. 취하려고 마시지는 않는다는 것. 대체로 유쾌하다는 것. 나는 거의 바닥을 보이는 삿포로를 쭉 들이켰지만, 아직 그들이 어떤 기분으로 이 보리술을 마시는지는 잘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Canon EOS-M + 22mm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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