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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봄이 오고 있다. 강변에 잠들었던 가지에선 아주 천천히 하품을 하는 사람처럼 꽃이 핀다. 이 도시는 이제 한해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민들을 매혹할 것이다. 사람들은 한결 가벼워진 외투를 입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강으로, 산으로, 공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기상 캐스터는 스크린에 펼쳐질 봄꽃에 지지 않으려고 밝은 원색의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어떤 정치적 쟁점이나 끔찍한 사고 소식보다도 중요하다는 듯 벚꽃의 개화 시기를 점칠 것이다. 이 도시의 봄이 아름답다는 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봄은 더 강렬하다.
그 봄을 만나지 못하고 나는 이제 우기가 시작되는 도시로 떠난다. 한낮의 기온은 이십 도나 더 높고, 습기에 묶여 열기가 빠지지 않는 도시로 이동한다. 그곳을 사진 몇 장으로만 만나본 탓에 그곳의 이미지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상상을 해볼까?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피부에 얇고 축축한 비닐 막이 덮이고, 호흡은 불쾌하며, 귀는 따갑고 코는 맵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물건에 관심을 보일 때만 미소를 짓다가 등을 돌리면 다급하게 더 낮은 가격을 흥정한다. 잔속에 담긴 얼음은 별 소득없이 물로 돌아가고, 평소 지독히도 싫어하던 허브 향은 매 젓가락마다 나를 괴롭힌다. 거대하고 화려한 왕궁은 압도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인파 속에서 뭐라도 중요한 걸 캐서 가야한다는 듯 건축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방이 가벼워졌다는 불길함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아마 가끔은 왜 이곳에 왔을까 후회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이 그대로 현실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럼에도 가야한다는 당위도 없고 그러니까 간다는 악취미도 아님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사건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이 도시의 봄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곳에 간다는 결정은 우리가 지난 겨울 밤 포장마차에 앉아 그 결정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고, 실행에 옮겨질 가치가 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공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엔 영영 놓쳐버릴 봄, 그 전조를 감상하면서.

평생 여행만 하는 사람처럼 별것도 아닌 여행 이야기를 가지고 이런저런 글을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써왔지만, 사실 살면서 가장 오랫동안 외국으로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쩌면 추운 포장마차 안에서 떠나자고 외치던 가장 큰 동기는 한 달만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그 기간이 대저 무엇이라고. (게다가 이렇게 거창하게 쓰는 것만큼 이번 여행이 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누이 그랬듯,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더 긴 여행을 위한 예행 연습이 될 수도 있고, 함께 가는 친구가 곧 맞이할 제 2의 인생을 기념하는 여정이 될 수도 있겠다. 그도 아니면, 그냥 올해는 봄을 대신해 더 긴 여름을 (다녀오면 이곳도 초여름의 기운이 감돌 것이다.) 맞이했다는 걸로 만족하면 그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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