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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각자 침대에 들기 전, D가 한 가지 제안했다.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호텔이 있는 골목길 건너,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오자는 거였다. 대체로 집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여행 중에 하려고 하지만, 나와 D는 평소 하던 일들을 타지에서도 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 봤자 거창한 건 없고, 맥도널드에 간다거나 스타벅스에 간다거나 하는 일들이 - 음주를 포함하여 - 그렇다. 국가별 물가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주는 코카콜라 지수라던가 맥도널드 지수 따위를 실제로 체험해 보려는 것이다. 한국과 몇백 원 단위로 미묘하게 가격이 다른 메뉴판을 올려다 보면 그 반사작용으로 이곳이 고향과는 다른 땅이라는 실감이 나곤 한다. 동시에 맛만은 기가 막힐 정도로 똑같다는 데 놀라면서 말이다.
앞으로 태국 북부를 거쳐 라오스에 머물다 베트남 하노이로 넘어가는 일정을 보았을 때, 제대로 된 방에서 잘 기회는 방콕밖에 없다며 처음 호텔은 좋은 곳 - 우리가 지금껏 머물었던 숙소에 비하면 - 으로 잡았다. 오크우드 계열의 넓고 깨끗하고 신식인 레지던스 형태의 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D의 선택에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태국의 아침, 아니 정오도 굉장히 좋은 거리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스쿰빗 소이 18. 나는 이 거리를 시작으로 방콕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층 짜리 브런치 카페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날씨는 생각보다 후텁지근하지 않았으며, 마사지 샵과 빨래방 앞에는 초연한 표정의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길을 걷는 나에게 피로한 몸을 녹이고 가라고 제안하는 여자도 있었다. 마사지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앞으로도 그들의 서비스를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큰길로 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현대식 호텔과 콘도는 왼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장기 투숙자를 상대로 하는 현지 가게들은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이사이 골목엔 낡은 아시아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혼란스럽고 매력적인 풍경이 그대로 간직돼 있었다. 한국 역시 현대와 근대의 거리가 혼잡하게 뒤섞인 나라이기에 우리는 거리 전체가 생활의 박물관이나 다름 없는 여행지에서 이질감과 기시감을 동시에 느끼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새벽 동안 실컷 내린 비로 공기는 깨끗했고, 하늘은 흐렸으며, 습도가 높아서 보이는 모든 색상이 선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빛의 산란이 없기 때문에 마치 제대로 칼리브레이션한 모니터처럼 있는 그대로의 색을 감상할 수 있었다. 걸음마다 겨드랑이에 땀이 솟아나고, 에어컨 바람 때문에 진이 빠졌던 몸이 기운을 되찾았다. 어떤 곳이든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중요한 시점이 있으니, 사소한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커피를 사러 가는 짧은 산책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되었다. 새벽에 육교에서 잠을 청하던 남자가 정오에도 죽은듯 누워있던 놀라움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스타벅스의 분위기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냥 당신이 동네에서 보던 그대로다. 그란데 사이즈 기준으로 잔당 110밧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좀 더 저렴하기는 하지만 커피 가격은 한국과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전날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고 편의점에서 물과 음료수, 아침으로 먹을 냉동식품을 왕창 사들이며 썼던 전체 금액에 준한 값을 치르며, 아무 생각 없이 사 마시던 이 커피가 얼마나 비싼 사치였는지도 깨달았다. 방콕의 저렴한 물가가 이미 내 경제적 잣대를 조정한 후였기 때문에 한국보다 몇백 원이나 더 싸다고 하더라도 다시 스타벅스에 올 일은 없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D와 나는 화려하게 여행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몇 가지 양보할 수 없는 기준 - 차차 설명할 것이다. - 만 제외하면 대체로 실속있고 저렴하게 돌아다니는 편이다. 앞으로 긴 여정이 남았고, 우리는 시간과 돈을 기만할 수 없다. 편의와 알뜰함 사이의 중간선을 어떻게 그어나갈지는 차차 길 위에 길들며 고민해 볼 문제였다. 다만, 이렇게 매혹적인 풍경은 오롯이 공짜이니,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껏 맛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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