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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새벽은 말근 쌀뜰물처럼 뽀얗게 빛났고 단 한 번 뿐인 여명을 저버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 후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키보드를 펼쳤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D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땐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다. 좀 더 아침이 묽어졌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싼 다음 일어날 시간이라며 D를 깨웠다.
서호에서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는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쓰는 동향의 얼굴이 자주 보였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이 15만 5천 동이었는데 쌀국수 두 그릇에 생수 한 병을 사자 딱 맞아떨어졌다. 1천 동 하나까지 털어냈다. 직원은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고수'를 알아듣고 고명에서 빼줬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체크인, 출국심사, 보안검사 모두 금방이었다. 면세점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기념품을 사들이기엔 충분했다. 담배도 한 보루 사려고 했으나 카드기가 고장나서 현금밖에 받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지만 결국 금연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린 한 카페에 앉아 베트남식 아이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탑승하길 기다렸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족하지 않을 여행의 시작과 달리 여행의 마지막 날, 마지막 공항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불필요하다. 대체로 지치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예정된 결말을 바꿀 수는 없다. 여기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하나의 페이즈가 끝났다는 사실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길다고 믿었던 시간이 돌이켜보면 얼마나 짧기만 한지. 머릿속에서 생략되고 압축되고 편의에 따라 각색된 28일 간의 여행은 그저 하룻밤 꿈일 따름이었다. 현실성이 없었다. 생생하지도 않았다. 가장 몰두했던 날들이 그렇게 가장자리부터 번져 흐릿해지자 현재 내가 앉아있는 공항 의자와 탑승 안내 방송 소리와 에이프런을 더듬고 다니는 비행기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단편소설처럼 시작 이전과 끝 이후가 잘려나가버린 토막 이야기에 무작정 쳐들어온 기분이었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지나온 여행이 어땠는지, 집으로 돌아간 이후가 어떠할지 논하지 않는다. 그저 공항 대합실에서 시간을 죽이다 비행기로 비상하기까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나 제 안에서 튀어나온 생각의 조각 따위를 늘어놓을 뿐이다. 연속성도 없지만 단절성도 없는 이상한 이야기. 자신이 수상한 단편의 주인공임을 화자 스스로도 아는 이야기. 어쩌면 주인공이 찾는 무언가는 지난 스물여덟 날이란 과정 이후의 결말, 결실, 감정적 결산일지도 몰랐다. 그걸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혼란이 전체 서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갈등 요소일 테고 말이다.
단편의 끝에서 화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 했음을 깨닫을까? 어딘가 놓친 고리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것이 무엇인지 추리할까? 아니면 그냥 운이 안 좋았다며 체념할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을까? 그의 결론에 나는 동감할 수 있을까?
비행기가 이륙한 후, 나는 저렴해서 부담없는 술 한 병을 샀다. 그것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밤이 가장 힘들 테니까 그 밤을 몽롱한 정신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오늘부터 집행할 처방전이었다. 스물여덟 날, 스물여덟 번의 증상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든든한 기분으로 술병을 짐칸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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