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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생각보다 한국에, 서울에, 일상에 적응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28일이 객관적으로 길다곤 할 수 없겠으나 이렇게 쉽고 빠르게 꿈이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만에 D를 다시 만나 술을 마시며 "우리 갔다왔던 거 맞지?"라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의미가 떠나기 전보다 더 희미해졌다. 여행의 기억이 그러했듯 현실도 수면 아래 세상처럼 흐릿해졌다.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온 건 음식이었다. 여행 중에는 달고 느끼한 그곳의 음식이 맞지 않았는데, 이젠 맵고 짠 한국의 음식이 맞지 않는다. 원래 짜게 먹고 맵게 먹는 편이었으나 몸이 달가워하지 않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여행을 할 때 음식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어디를 가든 한국 음식보다 내게 잘 맞는 음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무턱대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최소한 내가 좋아하던 많은 맛이 여행 중 입에 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던 현지 음식만큼 생소하게 변했다. 잔뿌리 중 몇 가닥이 뽑혀나간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땅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을 힘을 잃거나 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일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일에서 비롯되는 성취감이나 피로감, 스트레스 전부가 떠나기 전보다 현저하게 무의미해졌다. 종종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냥 그러려니 한다. 감각이 둔해지고, 마비가 곧 쾌감이 된다. 이게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묻는다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다. 떠나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건 아니다. 떠난다는 것에 현혹된 것도 아니다. 그냥, 모든 게, 의미없어졌을 뿐이다. 의미. 도대체 만사를 옥죄는 이 의미란 놈은 무엇이지?
무기력도 여행 후유증의 하나겠으나 그렇다고 만사에 무기력해지진 않았다. 글은 쓴다. 아니, 그 말도 거창하니까 열심히 노트를 정리한다고 하자. 책도 읽는다. 얼른 다음 책을 읽고 싶어 미칠 것 같다. 그게 전부다. 여기서 무릎을 탁 쳤다. 이번 여행의 후유증은 '내가 스스로 그러길 바라는 모습'으로 다이얼이 맞춰진 형태로 나타났다. 기뻐할 일이다. 춤이라도 춰야할 일이다. 하지만 일정 부분 상실감도 감출 순 없으니, 그건 무기력이 아닌 '무력하다는 슬픔' 때문이 아닌가 한다. 쓰고 읽어도 더 나아지는 건 없는 것 같다는 자각의 비극 말이다...
거의 매일 블로그에서 내 여행기를 읽었다는 Y가 "니 여행기는 너무 글루미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행기를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하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우울한 시리즈였던 건 맞다. 왜냐하면 여행 중에도 울적하거나 불만스러울 때 글이 잘 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냥 원초적인 기쁨으로 현재진행형인 여행을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원초적인 심드렁함으로 여행을 즐기면 안 되나? 원초적인 회의로 여행을 즐기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결국 여기엔 나라는 화자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런 글을 썼다. 이번 여행의 동기는 다녀와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그런 문장도 썼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여행이라면, 그냥 올해는 봄을 대신해 더 긴 여름을 보냈다는 걸로 만족하면 그만일 거라고. 그런 당찬 포부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지나간 글을 읽으며 되살릴 수 있었다. 오히려 떠나기 전에 다녀온 후의 변화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셈이다.
결론은 이렇다. 더 적고 더 작고 더 좁은 곳에 집중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 들뜬 마음으로는 글을 쓰지 못하니까 이 노트는 필연적으로 글루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래도 (햇빛 알레르기로 고생했으면서도) 태양이 조금이나마 좋아진 사람이 됐다는 것. 그래서 여름도 더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 수영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고, 사람을 만날 때 더 허물없는 사람이 되려한다는 것.
무엇보다 언제든, 얼마가 됐든, 기꺼이 떠날 수 있는 영혼을 가져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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