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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대교를 따라 달리다가 매도를 지날 때였다. 땅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무릇했다. 얕은 잔디가 가을이 온다고 저도 단풍이 든 것 같았다. 쓰다듬으면 손에 물이 들 듯한 붉은 빛을 보며 절로 앞으로 갈 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곳에서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세상 어느 곳보다 찬란한 단풍을 보려는 데 있을 테니까. 사소하지만 당위성 있는 연상 작용에 번쩍 현실감이 들었다. 저런 붉은 잔디가 무럭무럭 자라 길을 가르고 하늘을 채우고 눈앞을 어지럽히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도 덩달아 붉어지는 것 같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장거리 비행은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두 시간 삼십오 분. 마치 그 긴 시간을 보답해 주고 싶다는 듯 개인용 스크린과 USB 충전 포트, 심지어 콘센트까지 보인다. 작정하고 노트북, 스마트폰, 와이파이로도 접속 가능한 외장 하드, 블루투스 키보드, 7,200mA 용량의 보조 배터리, 그리고 디지털카메라와 온갖 케이블을 준비해 온 나로서는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다. 그냥 예전처럼 책 한 권에 펜과 노트만 들고 왔어도 자리가 길고 긴 비행의 무료함을 다 해결해 줄 일이었던 것이다. 스크린 안에는 많은 영화가 들어있었다. 그중 몇 편은 내 외장 하드에도 들어있는 것이었고, 또 그중 몇 편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하지만 이내 그 수많은 콘텐츠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중의 문제였고, 건조함과 뻑뻑함의 문제였으며, 수면욕의 문제였다. 나는 영화 두 편을 보다 말았고, 글은 500자도 쓰지 못했으며, 졸지 않으면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사실 몇 개월 전 방콕으로 날아가기 위해 여섯 시간의 비행을 했던 날보다는 훨씬 견딜 만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다지 편안한 환경이 아니라면 예전처럼 글을 쓰지도 못하고 책을 읽지도 못하며 심지어 영화조차 끝까지 보지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해야 했다. 점점 더 자주, 나 자신이 더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새로 발견하거나 새삼스레 실망하곤 한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비행기에 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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