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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 뜬 기분으로 얼마 걷지 않아 파웰 북스, 파웰 서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블록 전체가 서점인 이곳을 놓칠래야 놓칠 수도 없을 것이다.

색깔별로 나눠진 섹션,

직원들이 손수 쓴 추천사,

헌책과 새책이 한 책장에서 뒤엉켜

굳이 헌책을 찾을 필요도 새책을 고집할 이유도 없는 관용성까지.


포틀랜드에 갔다면, 파웰 서점엔 들러야 한다.

책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책이 좋아질 수 있다.


(사실 나와 아내는 이곳보다 시애틀의 엘리엇 베이 북컴퍼니를 더 마음에 들어하긴 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헌책 및 새책방이란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어디로 접근해도 매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다만, 매장이 워낙 넓다보니 그 안에서도 고저차가 있어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려면 서점 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Powell's City of Books


풀네임이 괜히 '책의 도시'인 게 아니다.





아들은 책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등과 책표지를 보는 걸 좋아한다.

요즘은 책 자체에도 흥미가 생겨서

겉표지를 찢어가면서까지 벗겨내고 페이지를 넘기려 애쓴다.

이것이 앞으로 독서를 즐길 거라는 반증이 되진 않겠지만,

어쨌든 아빠로서 희망은 항상 품고 있다.


다만 종이에 베일 때의 그 기분 나쁜 아픔을 알기에

좀 조심하길 바랄 뿐이며,

더불어 책도 찢지 않길 간청하고 싶다.


파웰 북스 내부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를 들 힘이 없어서) 거의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문제는 여기까지 초점 설정을 무한대로 해놓은 바람에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진들은 아래에 따로 모아보고자 한다.





아내는 책 두 권을 샀다.

모두 요리책이고, 중고책이다.

한 권은 1966년에 뉴욕 타임즈에서 발간됐고,

다른 한 권은 1960년에 커티스 퍼블리싱 컴패니란 곳에서 발간됐다.


재미있는 건 66년 뉴욕 타임즈 요리책은 사진이 흑백인데,

60년 요리책은 사진이 컬러라는 것이다.

요즘 요리책과는 확연히 다르게 메뉴, 재료, 레시피가 마치 사전처럼 꽉 차 있는 구성인 건 둘 다 마찬가지다.

66년도 책은 6.5달러, 60년도 책은 9.5달러였다. 물론 세금 없이 그 가격 그대로.

페이지가 700쪽을 거뜬히 넘는데 말이다!


60년도 책은 거의 성경 같은 분위기인데,

냄새도 오래된 성경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하다.

하긴 이것도 가정 요리의 바이블이니까.


아내는 어려서부터 국내외의 요리책을 모으는 게 취미였다.

어떤 책들은 사진이며 레이아웃이며 그대로 가져다 쓰고 싶을 만큼 감각적이고,

어떤 책들은 곰팡내가 폴폴 풍기는 고서의 위엄을 뽐낸다.


나도 여행을 가면 아내에게 요리책을 사주는 게 좋다.

그땐 약간 내 취향이 반영된다.





서점을 나와 조금만 걸으면

포틀랜드의 또 다른 명물인 에이스 호텔이 나온다.

호텔 안에 들어간 건 며칠 후의 일이다.


뭐랄까,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묵지도 않는데 커피를 사서 앉아 있기가 조금 겸연쩍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부득이하게 이상한 표정으로 나온 에이스 호텔 앞의 한 남자.





에이스 호텔 건너편에는 유니온 웨이라는,

복합 쇼핑 공간(이라는 멋없는 표현만 떠오른다)이다.


잡화, 식당 등이 모여있다.





유니온 웨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는 어떤 멋들어짐을 찾기 힘든데

(무슨 옷 브랜드 같기도 하고)

이 통로식 길을 통과하면

어, 이게 뭐야, 싶어진다.





가죽 가방이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다.

하지만 무거울 거 같아서 망설여 진다.

나는 가방에 너무 많은 것을 넣어 다닌다.





유니온 웨이 복도에 걸린 작품들.





조금만 걸어도 가볼 만한 곳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래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운타운 관련 포스팅의 표지로 쓰면,

가이드북 한 쪽에 조그맣게 삽입하면 좋을...

그런 구도인가?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해가 아주 늦게 진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바람이 점점 서늘해 지고,

거리의 색깔도 점차 진득해 졌다.


우리는 마침내 빌린 집으로 가기 위해

주차 장소로 향했다.





아래는 문제의 필름사진.





초점이 무한대에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내가 찍으려던 건 난간에 기대 잡지를 읽고 있던 전경의 아저씨였다.


서점 안엔 사람이 많았다.

구역마다 쏠림 현상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젊은층이었다.





지금 보니 책장이 비스듬하다.

책을 찾고 빼고 넣기에 편할 것 같다.





책장에 붙어 있는 추천사는

직원들이 손으로 썼다.

아주 사소한 부분인데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마 우리나라 몇몇 독립 서점도 이렇게 책을 소개하고 있겠지.

내가 운영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지만,

손님들이 초등학생이 쓴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것은 막을 수 없겠다.





이 '책의 도시' 안에서 길을 안내해 줄 사람도 필요하겠다.


아들이 읽을 만한 책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책이 좋을지,

또는 선생님이 읽으라고 시킨 책은 어디쯤에 있는지,

아들이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사주려는데 뭐가 좋을지,

아니면 화장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오늘 저녁은 뭐가 좋을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습득된 것은 있는지,

에이스 호텔에 가려는데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여기서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무한대이다.





연인이 데이트하기도 좋았다.

아마 서점 안에 있는 카페는 가격도 저렴할 것이다.

오래된 LP판을 사서 저녁 한 끼에 음악을 곁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주 선 책장에 각자 등을 기대고 책을 읽다가 가끔 눈을 마주쳐도 웃음이 나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점이 나가서 너무 아쉬운 이 사진.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문판이었다.

붉은색 표지에 검은 여성의 음영이 인상적이었다.

마침 여행을 가기 몇 주 전에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 후로 지금까지도 이 소설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더 반가웠다.


한국판 표지도 좋지만,

붉은색 표지도 이 연작 소설과 아주 잘 어울린다.

저 표지로 재판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처음 한두 장을 훔쳐보았는데,

번역도 잘 된 것 같았다.


독자로서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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