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노 섬의 파로 선착장에서 LN선을 타고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부표가, 뒤로는 섬마을이 우리를 전송하는 아스라한 손짓을 보았다. 모터보트의 항해는 30분 남짓 이어졌다. 그동안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이 지쳐 감각과 마음을 좀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색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어 할 곳, 알고 있는 색깔의 이름이 몇 되지 않는 나 같은 어휘 빈곤자라도 그만큼이나 황홀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몇 년 전, 어느 잡지에 실린 부라노 섬의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적인 나머지 현실감마저 없을 정도였다. 멀고 먼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건..
:: 여행을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영리한 솜씨에 놀라곤 한다. 주인의 유불리에 따라, 주인의 기호에 따라 구분된 기억은 망각의 릴 위에서 빙빙 돌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예컨대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금방 잊히는 데 반해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아주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행기 티켓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한다. 똑같은 공식을 우리가 묵었던 내륙, 메스트레 역에서의 하룻밤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섬이든 육지든 유럽의 겨울이 주는 가없는 적막함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아름다웠고 후자는 황량했다. 시내..
:: 본래 이 카테고리의 2010년 유럽 여행기에 있던 글이지만, 네이버포스트에 올리며 글을 좀 수정하고 사진과 편집을 새로 만져보았다. 또 가고 싶다, 베네치아. :: 기체는 작았다. 아담한 기내 분위기와 종종 작은 동체가 요동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리는 기체의 맨 뒷자리(35E, 35F)였는데 하나뿐인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28번 좌석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만약 이륙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앞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상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콜라를 먹으려면 1유로인가 2유로를 더 내야 하는 야박한 인심은 사소한 불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최악이었던 것은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오르자마자 배가 고..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9) - 프라하, 넷. 마지막 날] 보기. 하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굴뚝에서 뽑아 올린 것 같은 구름은 여전히 대류권을 장악중이었다. 그 아래로 차가운 습기가 뚝뚝 떨어졌다. 물 먹은 공기가 축 늘어지자 축제의 풍악도 울림새가 처량했다. 어느 겨울, 프라하의 아침. 유럽에서의 마지막 스케치. 객실 밖 창문으론 옆 건물의 낮은 옥상이 보였다. 공장지대나 산업도시의 변두리를 연상케 하는 거리도 시야에 잡혔다. 흐린 하늘이 나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나의 감정이 흐린 하늘을 곧 작별할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그저 회색빛 손길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호텔 내부에도 스며들었음만 확실했다. 막 깨어난 몸을 추스르자 식당은 좀 다를지 모른다고 믿..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8) - 프라하, 셋. 프라하 성] 보기 맥도날드는 많은 배낭 여행자들에게 있어 일종의 성지다. 빠듯한 예산과 일정 안에서 돈과 시간을 아끼기엔 이보다 안성맞춤인 곳이 없다. 탄수화물, 단백질, 약간의 비타민과 다량의 나트륨, 그리고 풍부한 지방이 함유되어 있으니 일단 인간은 햄버거만으로도 움직일 순 있는 셈이다. 그저 영양소의 비율이 문제일 뿐이지. 맥도날드가 들어선 지역을 붉게 표시한 '맥도날드 지도'를 보면 이 패스트푸드 공장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비만과 성인병, 거대 자본에 의해 변질된 인간의 식습관 같은 문제들을 잠시 뒤로 밀쳐놓으면 재미있는 사실이 보인다. 이런 전 세계적인 매장에 발을 들임으로써 여행지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이겨낼 수도..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7) - 프라하, 둘] 보기 다시 프라하 성을 오르던 순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명소로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로, 카를교에서 바라본 자태를 떠올린다면 누구나 그 거대한 성곽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을 호기심이 - 저 그림 같은 풍경 속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숨어있을까? - 이제 막 충족될 찰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지에서의 기대는 곧잘 깨어질 위험에 처하는 위태로운 존재다. 이 길의 끝에서 프라하 성도 우리의 기대에 무관심한 곳이었단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매번 상처 받으면서도 다시 사랑에 빠지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로선 매번 새로운 기대를 잉태하는 것 역시 멈출 도리가 없다. 프라하 성으로 들어가자. 입..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6) - 프라하, 하나. 구시가지] 보기 카를교에서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려면 적잖이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성을 머리 위에 얹은 흐라트차니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다.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워낙 시선을 빼앗는 장면이 많아 앞만 보고 걸을 순 없다. 빙빙 돌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미로가 있달까.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을수록 도시가 자세를 낮추더니, 마침내 색 바랜 적갈색 지붕을 우리의 발밑에 내려놓는다. 군데군데 눈이 덮여 배색이 더 멋스러웠는데, 언뜻 보면 붉은 빵 위에 파우더를 뿌려놓은 것 같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어찌 프라하 시내의 전경뿐이겠냐만은 앞으로도 겨울 여행을 고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여기서이다. 점점 성이 가까워진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 여행기 (15) - 프라하로 가는 길] 보기 프라하의 중앙역인 Hlavni nádrží의 역사는 작은 공항을 연상케 한다. 외국으로 오고 가는 열차가 주로 이곳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렸다.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할 순 없었지만 그들이 끌고 가는 캐리어, 또는 등에 맨 배낭을 보면 길을 떠난 사람이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은 반도국에다가 분단국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생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우선 가지고 있는 돈을 체코화인 코루나로 바꿔야 했다. 역의 환전소는 환율이 안 좋다고 하여 남은 유로화도 소진할 겸 가지고 있던 30유로만 모두 바꿨다. 그리곤 24시간 교통 패스를 ..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4) - 빈(비엔나), 다섯. 케른트너 거리] 보기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여행을 정의하는 많은 달콤한 말 가운데 알랭 드 보통의 이 한마디만큼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말도 없다. 덧붙여 그는 여행의 모든 운송 수단 중에서도 '기차'를 제일의 산파라고 말한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실제로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열차에서 내리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 여행에 낭만을 품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눈이 많이 내리던 빈의 마지막 모습. 그런 연유에서인지 아닌지는..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3) - 빈, 넷. 자연사 박물관] 보기 자연사 박물관을 나와 왕궁을 찾았다. '500년간 세를 누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남아있는 곳'이 공식적인 설명이겠으나 무엇보다 절감했던 건 입구 찾기가 힘들다는 사소한 난관이었다. 시민정원을 향하여 비교적 활짝 열려있는 신왕궁과는 차이가 있었다. 여행이 계속되면 길치도 마치 증강현실을 체험하듯 머릿속에 가야할 길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최소한 나는 반대 상황에 처해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평소 길 하난 잘 찾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일정이 반을 넘어가자 감각은 무뎌지고 친척동생에게 구박을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스페인 승마학교로 이어지는 좁은 문을 통해 구왕궁을 찾을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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