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되기도 하는데, 책이나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로맨스나 자극을 받은 누군가의 경험담,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먼 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비포 선셋’의 만남을 떠올리며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방문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선 데보라 카를 기다리던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세대가 다른 나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찾게 되겠지만).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발상지와 경전 속 일화가 벌어..
1. 무선 인터넷 이름에 프리나 메트로가 붙은 것들은 한두 번 속고 나니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됐다. 정오가 조금 지났는데 날이 개지 않아 모어 런던은 늦은 오후의 신시가지 같았다. 묘한 얼굴을 한 철상鐵像과 타워 브리지를 스케치하는 화가를 휴대전화의 카메라에 담고 무심코 설정창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헛숨이 나왔다. 드디어 나와 말이 통할 것 같은 이름 하나를 찾은 것이다. 등 뒤에 있는 시청사나 사무용 빌딩이 고향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부채꼴이 한 개와 두 개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예민한 녀석이었다. 시험 삼아 담벼락에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려보았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전송창이 차오르고, 지금 이 순간이 대부분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공유되었다. 시운전이 끝나자 메신저를 통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
1. 새벽에 눈이 떠졌다. 창밖으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런던 근교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젯밤 런던에 도착한 후 호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들었다. 선잠이 들지도 않았고 비행으로 말미암은 피로도 없었다. 이럴 땐 시차 적응이 빠른 체질에 참 감사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새벽 공기가 마시고 싶어졌다. 미로처럼 길고 복잡하며, 가끔 오븐 타이머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호텔 정문 앞엔 벌써 먹이를 잡아 온 새들이 식전 기도를 지저귀고 있었다. 기온이 낮지는 않은데 바람이 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런던의 스산한 추위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새벽부터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차들을 본다. 출근길인가 싶어 이네도 참 빡빡하게 사는구나 하는..
[여행과 에세이] 2011 유럽 여행기 (0) - 주마간산(走馬看山) 보러가기 1.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똑같은 골목, 똑같은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을 때 울리는 똑같은 인사말도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땐 평소보다 특별하게 느껴진다. 묵직한 캐리어와 손때 묻은 여행책자는 신문이나 휴대전화에 몰두해 있는 옆 사람과 전혀 다른 운명을 예고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 도시, 이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자기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희망과 기대가 빚어낸 이런 묘한 감정은 어느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비추는 햇살을 볼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 말이다. 갑자기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머리를 아프..
갑자기 8일 정도 유럽을 가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십중팔구는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유럽 출장이 출발 닷새 전에 결정이 되면 본인이야 당황스러워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선 저 친구 제대로 운이 좋구만,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이지 않냐며 격려하는 반응도 상당하다.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가 25개국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다시 그만큼이나 더 존재하는데, 어느 나라를 가느냐와는 상관없이 그저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좋겠다는 건 그 땅에 대한 지나친 동경인지도 모른다. 하긴 멀기도 멀고, 비행기 삯도 비싼데다가, 세계사를 배우는 순간부터 의식 속에서 서양 역사와 문화의 나침반은 그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니 당연한 일일까. 이렇게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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