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기로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맛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이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내가 삿포로에 와서 봤던 모든 곳 중 가장 ‘관광지’답긴 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전 일정 중 가장 공허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불명예의 자리엔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가 올랐다.) 유명한 맥주 박물관이라고 해서 주변 주택가와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공원 내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었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벌써 시 외곽에 닿은 듯했다..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반숙 계란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잤고, 덕분에 아침도 먹지 못했다. 세상은 심심한 모양인지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해도 거의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벽이 막 지난 것처럼 거리가 푸른빛으로 코팅돼 있었다. 여행 첫날의 숙취가 떠올랐다. 도대체 인간이란 학습할 줄 모르는 동물인가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좀 자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나 자신도 웃을 수 없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숙취를 해소한답시고 햄버거를 먹는 버릇이 있다. 고기에 야채, 빵까지 다 들어있으니 몸에 좋지는 않을지언정 영양소 구색은 다 갖췄다고 믿어서다. 특히 햄버거엔 리코펜이 함유된 토마토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토마토가 없으면 최소한 토마토케첩이라도 들어..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은 달콤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을 복제하는 커다란 집에 모여 어울렸고, 매일 밤 새로운 손님을 맞아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그곳에는 꿈 밖에서 알던 사람, 꿈속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이나 사실 생면부지가 아닌 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는 방 하나를 꽉 채운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도 가물가물하지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끝없이 생성되는 방 안에 가득했다. 흥미진진해 죽겠는데 페이지가 한참 남아 든든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을 마셨다. 꿈에서 깰 시간이 되어도 이곳이 ..
내겐 관람차를 탔던 기억이 없다. 한번은 올라봤을 법도 한데 너무 어렸을 때라 지워진 건지도 모른다. 그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시야가 점점 넓어지다 절정에 오르면 어떤 기분이 벅차오르는지 나는 모른다. 조심스레 지금에 와선 덤덤할 게 분명하리라 예측할 뿐이다. 이것이 한계라면 한계라 불러도 좋다. 감정을 움직이는 동력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나이가 됐음은 분명하다. 굳은살처럼 덕지덕지 붙은 껍질은 마음의 바퀴를 뻑뻑하게 하고, 톱니가 맞물리지 않고 자꾸 엇나가게 한다.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고 일에 열중해도 그걸 다 긁어낼 도리가 없다. 그러기엔 더께가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때마다 대청소를 하듯 아예 떠나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관람차에 오르는 게..
달맞이 고개에서 내려와 이른 점심을 먹자고 친구가 우릴 데려간 곳은 동백섬 입구에 있는 더 베이 101이었다. 돼지 국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숙취 때문에 속이 안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맛있는 건 먹어야 한다며 우리의 위를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 온 부산이나 한 번도 동백섬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뭐, 그냥 그런가 보다 싶지만. 더 베이 101 주차장에서 본 마천루들. 저 높고 무거운 빌딩들이 저렇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보면 압도될 수밖에 없다. 저대로 푹 꺼져버리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거의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도시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센텀 시티라든가 광안 대교 주변은 서울보다 훨씬 화려하다는 걸 느꼈다. 이국적인 느낌도 물씬. 더 베이 101안에는..
아케이드에선 세월이 읽힌다. 최신 상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 구조만큼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에선 아케이드를 파사쥬라고 부르는데, 파리 같은 대도시에선 19세기 초부터 이 파사쥬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에는 산업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 화려하고 매혹적이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겠지만, 오늘날 지붕이 있는 상가는 흘러간 유행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형태의 상가가 주로 재래시장으로 기능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바야흐로 백화점을 넘어선 대형 몰의 시대이니까.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로부터 온 형식이라는 데서 나는 본능적으로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는 게 분명하다. 삿포로의 다누키코지(狸小路) 상가도 아케이드다. 전체 길이 약 900미터,..
다누키코지 5초메 옆에 있는 카페 랑방(カフェ ランバン)은 웹서핑 중 발견한 곳이다. ‘삿포로 카페’라는 아주 원초적인 검색어로 찾아낸 게 용할 정도로 사진만으로도 꼭 한 번 가봐야겠다 싶었던 카페다. 이는 거리를 걷다가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곳을 우연히 발견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카페 앞에 섰을 때, 황망히 지나치려다 다시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을 당위 비슷한 걸 읽어냈으니까. 삿포로 TV 탑에서 다누키코지까지 걸어오면서 몸이 많이 지쳤다. 여행 가방과 함께 챙긴 숙취는 그럭저럭 해소됐지만, 잠은 여전히 부족했다. 홍콩이나 마닐라 같은 곳에선 어떻게 새벽까지 놀았던 걸까. 역시 내 몸속 기관은 알코올이 들어가야 피로를 잊고 작동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엔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
내가 묵은 호텔은 다누키코지 6쵸메에 위치한 도미 인 삿포로 아넥스(Dormy Inn Sapporo Annex)였다. 해산물이 포함된 뷔페식 아침 식사에 대중탕까지 딸려있는 곳인데 가격은 부담 없이 저렴했다. 십 층에 있는 싱글룸은 예상했던 대로 작았지만, 냉난방 시설도 완벽했고 공기 청정기 또한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건물 안에서 입기 좋은 실내복을 제공하고 로비엔 공용 제빙기까지 있으니 숙박비를 낸 건 내 쪽인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지는 역설이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딱 살아보는 건 어떨까. 평소 욕탕이나 사우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매일 들어가 줄 수도 있는데. 책상에 만년필과 공책을 배치하고 그 공백을 매일 같이 채워나갈 수 있을 텐데. 마침 장기 투숙자를 위한 가격 안내표가 붙어 있었다. ..
멀어지면 더 가까워진다는 말엔 어폐가 있지만, 이 문장은 한편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아포리즘이기도 하다. 미비한 준비 탓에 스마트폰 속 지도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그 틈을 타 메시지도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떠나기 전에는 되도록 연락 두절 상태로 남겠다고 공언했으나 혼자 온 여행엔 유혹이 따른다. 어쩌면 메시지가 나에게 온 게 아니라 내가 메시지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정경을, 이 분위기를, 여기 이 기분을 누군가에게 당장 전하지 않고선 못 배길 지경이었다. 혼자 있으려는 심보와 혼자 있음을 확인하려는 심보 사이엔 차이가 있다. 내가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알게 된 순간,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날 위인은 못 된다는 것도 더불어 알았다. 소중한 것과 아쉬운 것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이를 ..
삿포로 역부터 내가 묵을 호텔에서 가까운 스스키노 역까지는 지하철 난보쿠선(南北線)으로 두 정거장이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이제 막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면 택시나 지하철로 숙소까지 이동하는 게 상식이겠다. 나 역시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잡한 대기실로 내려와 출구를 찾아 헤매다 북쪽 입구 앞에 섰을 때, 유리문 밖으로 새카만 하늘과 어둑어둑하게 꺼져가는 빌딩의 불빛을 보았을 때, 생각이 달라졌다. 저 어둠 속으로 당장 사라지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걸어서 이 도시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가도 된다는 것 역시 여행자의 상식 중 하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가려니까 너무 추운 것이다. 그래서 삿포로 역부터 스스키노 역을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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