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로 이동하는 TGV의 2등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데 뭔가가 자꾸 등에 부딪힌다. 돌아봤더니 여섯 살 정도 된 아이가 내 의자를 열심히 차고 있었다. 피곤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아이가 차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마음껏 짓까불게 놔두었다. 나중엔 발길질보다 엄마에게 계속 뭔갈 이야기하는 소리가 더 고생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잠잠해 졌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아이가 마침내 뭔가에 몰두한 순간. 아니, 이렇게 얌전할 줄 아는 녀석이 말이야. 찰깍 사진을 찍은 건 지금껏 내 의자를 찬 대가다. @TGV, Geneve, Switzerland canon A-1 + 50mm kodak 100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7) - 프라하, 둘] 보기 다시 프라하 성을 오르던 순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명소로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로, 카를교에서 바라본 자태를 떠올린다면 누구나 그 거대한 성곽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을 호기심이 - 저 그림 같은 풍경 속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숨어있을까? - 이제 막 충족될 찰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지에서의 기대는 곧잘 깨어질 위험에 처하는 위태로운 존재다. 이 길의 끝에서 프라하 성도 우리의 기대에 무관심한 곳이었단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매번 상처 받으면서도 다시 사랑에 빠지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로선 매번 새로운 기대를 잉태하는 것 역시 멈출 도리가 없다. 프라하 성으로 들어가자. 입..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6) - 프라하, 하나. 구시가지] 보기 카를교에서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려면 적잖이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성을 머리 위에 얹은 흐라트차니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다.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워낙 시선을 빼앗는 장면이 많아 앞만 보고 걸을 순 없다. 빙빙 돌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미로가 있달까.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을수록 도시가 자세를 낮추더니, 마침내 색 바랜 적갈색 지붕을 우리의 발밑에 내려놓는다. 군데군데 눈이 덮여 배색이 더 멋스러웠는데, 언뜻 보면 붉은 빵 위에 파우더를 뿌려놓은 것 같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어찌 프라하 시내의 전경뿐이겠냐만은 앞으로도 겨울 여행을 고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여기서이다. 점점 성이 가까워진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 여행기 (15) - 프라하로 가는 길] 보기 프라하의 중앙역인 Hlavni nádrží의 역사는 작은 공항을 연상케 한다. 외국으로 오고 가는 열차가 주로 이곳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렸다.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할 순 없었지만 그들이 끌고 가는 캐리어, 또는 등에 맨 배낭을 보면 길을 떠난 사람이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은 반도국에다가 분단국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생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우선 가지고 있는 돈을 체코화인 코루나로 바꿔야 했다. 역의 환전소는 환율이 안 좋다고 하여 남은 유로화도 소진할 겸 가지고 있던 30유로만 모두 바꿨다. 그리곤 24시간 교통 패스를 ..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4) - 빈(비엔나), 다섯. 케른트너 거리] 보기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여행을 정의하는 많은 달콤한 말 가운데 알랭 드 보통의 이 한마디만큼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말도 없다. 덧붙여 그는 여행의 모든 운송 수단 중에서도 '기차'를 제일의 산파라고 말한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실제로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열차에서 내리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 여행에 낭만을 품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눈이 많이 내리던 빈의 마지막 모습. 그런 연유에서인지 아닌지는..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3) - 빈, 넷. 자연사 박물관] 보기 자연사 박물관을 나와 왕궁을 찾았다. '500년간 세를 누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남아있는 곳'이 공식적인 설명이겠으나 무엇보다 절감했던 건 입구 찾기가 힘들다는 사소한 난관이었다. 시민정원을 향하여 비교적 활짝 열려있는 신왕궁과는 차이가 있었다. 여행이 계속되면 길치도 마치 증강현실을 체험하듯 머릿속에 가야할 길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최소한 나는 반대 상황에 처해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평소 길 하난 잘 찾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일정이 반을 넘어가자 감각은 무뎌지고 친척동생에게 구박을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스페인 승마학교로 이어지는 좁은 문을 통해 구왕궁을 찾을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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