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말, 삿포로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늦은 휴가 목적지로 염두에 두고 있던 곳은 원래 교토였다. 하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삿포로 왕복 항공권이 올라와 있는 걸 보고, 게다가 딱 네 장 남아 있는 걸 보고, 예약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였다. 실은 이 가격일 만한 시기인 것이다. 가이드북에서 홋카이도 추천 여행시기로 일 년 중 아홉 달을 꼽았는데 11월은 나머지 불운한 석 달 중 하나다. 단풍은 지나갔고 눈은 잘 오지 않는 어중간한 달. 삿포로 시내 호텔 가격이 서울 모텔 가격보다 싼 걸 보면 말 다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겐 최적의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도시엔 분명 사람을 유혹하는 면이 있다. 한산하다 못해 허전한 거리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걷고..
혼자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한다는 흔히 쓰이는 말이 최소한 나에겐 해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다. 여행이라는 라벨을 붙인다면 그건 번지수를 착각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 혼자 다니다 보면 생각의 양이 엄청나게 줄어든다. 그저 끊임없이 혼잣말을 반복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느끼기만 할 뿐이다. 마치 영사기의 빛을 쬐고 있는 하얀 스크린처럼. 세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덧씌우지만, 남는 흔적이라고는 먼지 몇 줌뿐이다. 물론 나중에 회상하면 몇 줄이라도 쓸 거리가 생기긴 하지만, 당장은 기대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내가 다..
마닐라는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교외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엄청나게 막혀서 짧은 거리에도 몇 시간씩 소비해야 했다. 하지만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걷기에 있을지언정 차를 타고 보는 풍경도 허투루 볼 수만은 없다. 인도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도 위에선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 교외 풍경 등은 차를 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이국의 정취, 평범한 삶의 조각은 주거지역의 골목길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간식을 사서 시골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본다. 집과 학교가 있는 익숙한 동네에서 일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그 고속도로 위, 등유 냄새 코를 찌르는 휴게소였다. 버스를 더 많이 타 본 탓인지 나는 기차역보단 고속도로 휴게..
일광욕이라든가 광합성이라든가 전부 여름 햇살 아래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나는 피부가 검고, 여기서 삽시간에 더 시커메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땡볕을 피하는 편이다. 누가 그 무자비한 레이저를 좋아하겠느냐만은 난 보통보다 유난스럽기는 하다. 그러니 태양의 무게가 훨씬 무거운 지역으로 여행을 오면 매일 아침 창밖을 보며 저 햇살 아래로 나가야만 하는가 회의에 빠지곤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외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결국 챙 있는 모자를 찾거나 선 블록 크림을 보다 꼼꼼하게 바름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거리에 야자수가 자랄 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모든 조치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고야 말지만. B의 집은 거의 리조트를 방불케..
어제에 이어 다시 올리는 부산 여행 사진. 사실 찍은 장수에 비해 올릴 사진은 그렇게 많지 않아 서너 편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온통 먹은 이야기 뿐이라 코멘트 붙일 것도 없고. 둘째날 아침에 일어나 날 반겨준 건 엄청난 숙취였다. 많이 마신 건 아니었는데, 잘못 마신 모양이었다. 정말 밖으로 나가기 싫었는데 억지로 차에 몸을 실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목에 금정구라고 써놨는데, 사실 금정구에서 뭐 대단한 건 한 건 아니고(뭐하는 동네인지도 잘 모른다) 이쪽에서 아침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친구 말로는 유명한 곳이라 한다. 더도이 종가집 돼지국밥이라던가. 사실 들어갈 때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도 몰랐다. 나중에 감으로 지도를 검색해 보다가 찾았을 뿐. 주차장 벽..
친구들과 사흘 동안 부산에 다녀왔다. 아마 여기 블로그에선 한 번도 소개하지 않았을 오랜 친구들로, 같이 여행을 가는 건 거의 십 년만이었다. 부산에서 일(이라고 하기엔 좀 더 학구적이면서 영업적인 면도 갖춘)을 한 지 일 년 반 정도 된 친구의 호출 덕분이었다. 서울에서 내려가는 사람만 넷. 현지에서 만난 친구까지 하면 다섯. 대체로 큰 계획 없이 먹으러 다녔던 사흘이었다. 네 명이 내려가니까 KTX보다는 기름값과 톨게이트 비용이 더 저렴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안타깝게 내 면허증은 아직 장식용이라 운전은 두 사람이 나눠서 했다. 하필 부산 국제영화제 기간과 딱 맞아 떨어져 걱정을 했었는데 부산까지 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혼자 부산에 살고 있는 친구는 부산대에서 만났다. 아주 오래된 유머 중에 부산대..
패스트푸드의 자극적이고 획일적인 맛을 누가 싫어하겠느냐만, 나 역시 패스트푸드를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일부러 먹지 않으려고 한다. 중독은 순식간이고, 뒷감당은 평생이니까. 하지만 여행을 가면 이상하게 패스트푸드는 꼭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돈도 아낄 수 있고, 실패할 확률도 적으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한국에도 있는 글로벌 체인이라면 나라마다 차이가 나는 아주 사소한 지점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그런데 B가 소개한 패스트푸드는 필리핀에서는 유명하나 한국에는 없는 브랜드들이다. 특히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 차우킹은 구전으로 안 것도 아니고 매장을 눈으로 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와 D는 원래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게 한국 한정, 그것도 고량주를 5천원에 파는 배달 전..
이미 전편에서 Y와 K를 맞이하기 위해 터미널 4에서 터미널 3으로 이동한 우리지만, 시간을 조금 되돌릴 필요가 있겠다. 끔찍하게 맑고 더운 날이었으며 덕분에 하늘은 불가피할 만큼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낮게 날고 있는 구름도 인상적이었다. 원근감은 오롯이 그들의 손에 놓여 있었기에 구름의 양과 무게에 따라 때로는 하늘이 낮아지기도 했고 때로는 더 높아지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 머리 위에 커다란 천을 펼친 다음 그 표면에 역동적인 영상을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아니, 비행기를 타고 늦은 밤 마닐라의 허름한 공항 터미널에 내리던 순간까지도 이번 여행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냥 고속버스를 타고 교통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달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를..
무릇 여행의 기쁨은 누군가 공항에 마중 나온 이가 있어 그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줄 때에 있지 않을까? 이 문장이 의문형인 이유는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술적으로 보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일이나 의무에 의한 마중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나와 D가 홍콩에 가던 세 번의 여행 첫머리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까닭 없이 서운해지고는 했다. 어쩌면 일부러 서운해져 우리끼리 더 잘 놀아보자고 다짐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슬픈 처지가 아니다. 마닐라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친구, B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자정이 넘는 시각이었던 탓에 혹시나 그가 곯아떨어져 나오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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