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생각보다 한국에, 서울에, 일상에 적응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28일이 객관적으로 길다곤 할 수 없겠으나 이렇게 쉽고 빠르게 꿈이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만에 D를 다시 만나 술을 마시며 "우리 갔다왔던 거 맞지?"라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의미가 떠나기 전보다 더 희미해졌다. 여행의 기억이 그러했듯 현실도 수면 아래 세상처럼 흐릿해졌다.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온 건 음식이었다. 여행 중에는 달고 느끼한 그곳의 음식이 맞지 않았는데, 이젠 맵고 짠 한국의 음식이 맞지 않는다. 원래 짜게..
28일 간의 기록. 28일 동안 기차와 배에서 잔 날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군데의 숙소에서 묵었다. 가장 많이 숙소를 옮긴 곳은 라오스의 방비엥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이동했다. 택시, 툭툭이, 송태우, 시내버스, 미니밴, VIP 버스, 열차, 자전거, 오토바이, 슬로우 보트, 스피드 보트, 크루즈, 카약, 비행기 등을 탔으며, 무엇보다 두 다리가 최고의 이동수단이었다. 현금으로 가져 간 1,280달러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ATM기는 두 번 이용했는데 한 번은 재미삼아 해봤고 한 번은 당장 쓸 돈이 없어서 해봤다. 현지에서 카드로 계산한 비용 중 가장 비쌌던 건 2박 3일 하롱베이 크루즈 투어였다. 그리고 단시간에 최고 비용을 쓴 건은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가는 베트남 항공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만..
비엔티안 왓따이 공항은 예상했던 대로 규모가 작았다. 많은 한국 분들이 하노이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을 전송하는 라오인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포옹으로 이모 쯤 되는 여자를 보냈다. 그녀는 아마 하노이에 사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면세점에서 미니어처 위스키와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갑자기 문명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은 건 비행기에 올라서다. 우리는 그나마 저렴한 베트남 항공을 선택했는데, 듣던 대로 출고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좋은 기종이었다. 베트남 전통 의상을 개량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다니고, 짐칸 아래는 모니터도 달려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에게 비상구 자리를 배정해 준 카운터 직원에게 감사했다. 비지니스 ..
"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 unknown. Benoni 카페의 바 뒤에는 커다란 분필 글씨로 그렇게 써 있었다. 우리가 아직 괜찮지 않은 건,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건, 아직 우리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을 상상하는 건 슬픈 일이다.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넘어가는 날에 우리가, 아니 특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카페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던 것밖에 없다. 약 다섯 시간 반을 카페에 앉아 있었다. 쓰고 읽다가 지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시간이 남았다. 좀이 쑤시..
비엔티안에서의 낮 산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길 것 같지도 않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려 했던 이유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비엔티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라오스를 여행하기 위해 공항을 이용하거나(공항이 시내 안에 있다. 여행자 거리에서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십오 분 정도 걸린다.) 여행자 거리에서 커피나 베이커리, 꽤 근사한 식사를 즐기거나 아니면 그냥 걸어다니며 메콩 강 건너편으로 태국 땅을 구경하거나 가끔 마음이 동하면 라이브 뮤직을 하는 펍이나 나이트 클럽에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거나. 이 정도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조심스레 그건 오산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외국 여행자들의 블로그를 봐도 대부..
네 시간 정도를 달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뭐, 이제는 너무 익숙한 일이지만, 비엔티안 시내는 전혀 가깝지 않았다. 우리는 또 툭툭이를 타야 할 운명이었다. 도대체 왜 터미널이 시내에서 가깝지 않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툭툭이나 승합 차량을 위해 일부러 터미널이 멀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공생 관계인 것이다. 방비엥에서 비엔티안까지 오는 VIP 버스가 한 사람에 4만 낍이었는데, 비엔티안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로 가는 벽도 없는 승합차량은 한 사람에 2만 낍이었다. 한화로 하면 큰 돈이 아닌 게 분명하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요금 체계가 아닌가. 툭툭이가 모든 시내 교통 수단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
우리가 오전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일어나 방갈로에서 제공하는 네스카페 믹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차례대로 샤워를 한 후 차례대로 짐을 꾸렸다. 이제 내 45리터짜리 배낭에 짐을 쑤셔넣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무언갈 버리지도 않았는데 배낭은 점점 홀쭉해지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 무언갈 잃어버렸음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다. 우리의 여행이 이십 일째를 맞았고, 일주일만에 방비엥을 떠나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으로 향한다. 우린 일부러 버스 시간도 느즈막히 잡았다. 짐을 다 싸고도 시간이 남아 어제 사둔 컵라면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다. 그리고는 커피와 와이파이를 할 수 있는 오두막에 앉아 한 시간을 정오..
일어나도 가라앉지 않은 알레르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오늘도 일찍 일어났지만, 꾸물거리고 미적거렸다. 드럽게 느린 와이파이로 여행기를 올린 후, 몇 번이나 팔의 상태를 확인했다. 본다고 나아지진 않는다.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한 다음 정오를 조금 넘겨 강가로 향했다. 강가에는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방갈로가 여러군데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변에 작은 오두막이 지어져 있어서 거기 드러누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있었다. 방갈로가 어떤 상태인지 둘러보고 맥주 한 병을 겨드랑이에 낀 채 오두막에 앉자, 아, 드디어 평화가 나에게 찾아왔다. 강에는 백인 아이와 라오인 아이가 나란히 발가벗고 수영을 하고 있다. 국적, 아니 인종조차 알 수 없는 한 부부는 수영복을 입은 채 태양 아래 늘어져 책을 읽고..
방비엥에 도착하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총 8시간 30분의 곡예비행을 마치고 땅에 착륙한 비행사가 된 기분이었다. 방비엥의 첫인상 역시 루앙 프라방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구역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게 좋았다. 우리는 흥정할 것도 없이 (아저씨에게도 흥정할 마음이 전혀 없기도 했지만) 툭툭이를 타고 미리 예약한 숙소 옆에 내렸다. 구활주로에서 들려오는 현지인들의 축제 소리에 시끄럽긴 했지만, 숙소 상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찬물로 샤워하자 기분도 풀렸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음악도 우리를 힘 나게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듣던 대로 방비엥엔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젊은 친구들과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은 중년 남녀의 무리를 지나쳤다. 강가 주변에는 K..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기니까 여행의 절반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뭔가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은 아무리 신비 절정의 외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내가 굳이 일주일을 넘는, 그러니까 최소 한 달 이상의 여행을 떠나려 했던 건 그 긴 시간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내가 어떻게 그 환경을 받아들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꽁한 마음이 풀릴까? 자연스럽게 아무하고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향수라는 걸 느낄까? 글은 잘 써질까? 동행자와 싸우진 않을까? 뭔가 더 배우는 게 있을까? 꽤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성격이 드디어 무너지고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에서 멈춰 보자. 평소 난 정말 무난한 성격이다. 사회생활을 예로 들자면, 위로는 그럭저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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