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4) - 빈(비엔나), 다섯. 케른트너 거리] 보기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여행을 정의하는 많은 달콤한 말 가운데 알랭 드 보통의 이 한마디만큼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말도 없다. 덧붙여 그는 여행의 모든 운송 수단 중에서도 '기차'를 제일의 산파라고 말한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실제로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열차에서 내리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 여행에 낭만을 품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눈이 많이 내리던 빈의 마지막 모습. 그런 연유에서인지 아닌지는..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3) - 빈, 넷. 자연사 박물관] 보기 자연사 박물관을 나와 왕궁을 찾았다. '500년간 세를 누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남아있는 곳'이 공식적인 설명이겠으나 무엇보다 절감했던 건 입구 찾기가 힘들다는 사소한 난관이었다. 시민정원을 향하여 비교적 활짝 열려있는 신왕궁과는 차이가 있었다. 여행이 계속되면 길치도 마치 증강현실을 체험하듯 머릿속에 가야할 길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최소한 나는 반대 상황에 처해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평소 길 하난 잘 찾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일정이 반을 넘어가자 감각은 무뎌지고 친척동생에게 구박을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스페인 승마학교로 이어지는 좁은 문을 통해 구왕궁을 찾을 수 ..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2) - 빈(비엔나) 셋, Krah Krah] 보기 누군가에게 정이 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처음 만나는 사람과 얼마 만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하는 문제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있어도 첫눈에 정이 들었다는 말은 없는 걸 보면 정의 숙성기간이 사랑보다 길다는 건 알겠다. 하긴 정이란 말 자체에 그 대상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은가. 하지만 반드시 누적된 시간이 길어야 정이 드는 건 아니다. 출장이나 여행 중에 스친 사람에게, 때로는 인터넷에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아이디에게 정이 들 여지도 있다. 수십 년을 같이 산 부부가 눌러 담은 오만가지 정처럼 농밀하진 않겠지만, 그렇게 짧은 교제의 와중에도 마음이 열릴 가능성이..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1) - 빈(비엔나) 둘, 벨베데레 궁전] 보기 여전히 비구름이 남아있는 하늘 때문에 황혼은 흐리터분했다. 사람들의 추천대로 우리는 링을 순환하는 1번 트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노면전차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실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빈의 시내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수록 하늘은 붉어졌고, 거리는 가로등 불빛에 젖어 호박색으로 물들었다. 다양한 빛깔로 깜빡이는 네온사인도 노란 색감에 잘 조화되는 인상이었다. 빈의 건물들은 그런 조명 사이에 우뚝 서서 세련미를 뽐냈지만, 동시에 커다란 모형이나 영화의 세트장 같은 느낌도 풍겼다. 트램에서 본 노부부. 부인의 표정에서 동반자에 대한 한없는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 바퀴를 돌고 Schweden pl..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0) - 빈(비엔나), 하나] 보기 빈에서의 첫날, 의외의 일들로 반나절을 보낸 우리는 즉석에서 나머지 반나절을 위한 계획을 세워보았다. 벨베데레 궁전 방문, 호텔에서 휴식, 저녁을 먹고 시끄러운 술집에서 맥주 한 잔. 굵직굵직하게 자른 고깃덩어리처럼 넉넉한 일정표였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한다는 세목조차 없었다. 어딘가에 적어두거나 외워둘 필요도 없이 간단하고, 본능대로 움직이면 그만이니 실행에 옮기는 것도 쉬웠다. 마음에 쏙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행선지인 벨베데레 궁전은 내가 가자고 고집한 곳이었다. 첫째 이유는 물론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파리에서 좋아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놓쳤던 기억이 떠오르며, 이번만큼은 그런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9) - 부라노 섬, 그리고 베네치아 셋] 보기 낭만적인 파리나 외로운 베네치아처럼 어떤 장소에 어울리는 꼭지를 제 나름대로 붙여 보는 건 여행자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선 그 권리를 행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고 했을 때, 딱히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큰 감동을 받는 바람에 말문이 막히는 경우와는 달랐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간 어디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 가까웠다. 발음조차 애매한 분위기를 띠는 '모호하다'란 형용사나, 어쩐지 책임을 저버리는 느낌이 드는 '알 수 없는'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상태 말이다. 물론 빈을 수식하기에 좋다고 널리 알려진 단어들은 많다. 일반적으로 '음악'이 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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