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 니체는, 16세기에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곳은 독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오직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카프카 시대의 관료주의는 오늘날과 비교할 때 순진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카는 관료주의의 끔찍함을 간파했고 그 후로 관료주의는 일상적이 되어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1960년대에는 뛰어난 철학자들이 '소비 사회'에 비난을 퍼부었지만 해가 감에 따라 현실이 이 비난을 훨씬 뛰어넘어 버린 나머지 그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게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실 또 다른 일반 ..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 '커튼', 밀란 쿤데라 커튼저자밀란 쿤데라 지음출판사민음사 | 2012-10-12 출간카테고리소설책소개소설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최고의 현대 소설가 중 한 명...
"그렇다면 대단원을 향한 광적인 뜀박질이 아닌 건 모두 따분하다는 얘긴가? 이 맛있는 오리 궁둥이를 뜯으며 자네는 따분함을 느끼나? 목표를 향해 서두르나? 오히려 자네는 이 오리 고기가 가능한 한 천천히 자네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네. 그 맛이 영원히 지속되길 원한다고.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 (중략) 내 마음에 드는 게 바로 그런 거라네.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아베나리우스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다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증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도창성을 확인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중략] [로라는 덧셈법에 따라]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 [중략] 바로 여기에 덧셈 법에 따라 자아를 가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희생하는 묘한 역설이 있다. 그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자아를 창출하기 위해 뭔가를 덧붙이고자 애쓰지만, 이와 동시에 그 덧붙은 속성들을 선전하며 최대한 많은 이들이 자기들과 닮게 ..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중략) 이 세상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대해줄 필요가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서 기인한다. 마슬렌니코프와 간수장과 호송 장교를 비롯한 그 모든 사람들이 주지사나 간수장이나 호송 장교가 아니었다면 이런 무더위에 그 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호송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무 번은 생각했을 것이고, 호송 도중에 스무 번은 멈춰 서게 하였을 것이며, 몸이 쇠약해지고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을 보면 그들을 대열에서 빼내 그늘로 데려가 물을 먹이고 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동정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앞의 인간을 보지 않고 또 인간에 대한 자기..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퍼져 있는 미신 중 하나가, 인간 개개인은 저마다 일정한 자기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한 사람, 약한 사람, 영리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이렇게 분류할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해 그 사람이 악할 때보다는 선할 때가 더 많고, 어리석을 때보다는 영리할 때가 더 많고, 게으른 때보다는 근면한 때가 더 많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선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영리한 사람이라 하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약한 사람이라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이렇게 나누고 있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 - 밀란 쿤데라, '농담' 중 농담저자밀란 쿤데라 지음출판사민음사 | 1999-06-25 출간카테고리소설책소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펴냈던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
당시에 나는 그에 대해 증오밖에 없었으며, 이 증오란 것은 너무도 강렬한 빛을 발사해서 그 속에서는 사물의 윤곽이 사라져버리는 법이다. 중대장은 내게 그저 앙심을 품은 교활한 쥐새끼같이만 보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우리의 중대장 역시 아직 미완인 사람이었고,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무..
"뇌 속에는 시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해서 우리를 매료하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기록되는 모양이다. 토마시가 테레자를 안 후부터 어떤 여자에게도 그의 뇌 속에 있는 이 지대에 아주 사소한 흔적조차도 남길 권리가 없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저자밀란 쿤데라 지음출판사민음사 | 2009-12-24 출간카테고리소설책소개20세기 최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을 만나다! 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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