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여행의 기쁨은 누군가 공항에 마중 나온 이가 있어 그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줄 때에 있지 않을까? 이 문장이 의문형인 이유는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술적으로 보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일이나 의무에 의한 마중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나와 D가 홍콩에 가던 세 번의 여행 첫머리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까닭 없이 서운해지고는 했다. 어쩌면 일부러 서운해져 우리끼리 더 잘 놀아보자고 다짐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슬픈 처지가 아니다. 마닐라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친구, B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자정이 넘는 시각이었던 탓에 혹시나 그가 곯아떨어져 나오지 못할까..
공항 사진을 올리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항 사진만 올리고 싶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렇게 사진 정리하기 귀찮았던 적이 또 있나 싶다. 어느 정도 보정을 해줘야 조금이라도 성에 찬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필름 카메라는 참 편했다. 스캔 받은 파일을 크기만 줄여서 올리면 됐으니까. 올릴 사진을 고르는 데 애를 좀 먹긴 했지만, 대부분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그 고민만 했으면 됐으니까. 마지막 홍콩 여행기의 첫 편에 유난히 공항 사진이 많았는데, 그걸 올리며 매우 신이 났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이유 없이 공항 사진을 만지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한없이 창백한 구조물에 불과한데 어떤 장면이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공항 사진엔 있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무라노 섬의 파로 선착장에서 LN선을 타고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부표가, 뒤로는 섬마을이 우리를 전송하는 아스라한 손짓을 보았다. 모터보트의 항해는 30분 남짓 이어졌다. 그동안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이 지쳐 감각과 마음을 좀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색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어 할 곳, 알고 있는 색깔의 이름이 몇 되지 않는 나 같은 어휘 빈곤자라도 그만큼이나 황홀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몇 년 전, 어느 잡지에 실린 부라노 섬의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적인 나머지 현실감마저 없을 정도였다. 멀고 먼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건..
:: 여행을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영리한 솜씨에 놀라곤 한다. 주인의 유불리에 따라, 주인의 기호에 따라 구분된 기억은 망각의 릴 위에서 빙빙 돌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예컨대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금방 잊히는 데 반해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아주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행기 티켓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한다. 똑같은 공식을 우리가 묵었던 내륙, 메스트레 역에서의 하룻밤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섬이든 육지든 유럽의 겨울이 주는 가없는 적막함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아름다웠고 후자는 황량했다. 시내..
:: 본래 이 카테고리의 2010년 유럽 여행기에 있던 글이지만, 네이버포스트에 올리며 글을 좀 수정하고 사진과 편집을 새로 만져보았다. 또 가고 싶다, 베네치아. :: 기체는 작았다. 아담한 기내 분위기와 종종 작은 동체가 요동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리는 기체의 맨 뒷자리(35E, 35F)였는데 하나뿐인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28번 좌석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만약 이륙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앞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상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콜라를 먹으려면 1유로인가 2유로를 더 내야 하는 야박한 인심은 사소한 불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최악이었던 것은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오르자마자 배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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