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과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상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오하우 섬에 있는 국제공항은 최초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가 세웠다 해도 믿을 정도로 낡았다. 여행의 시작과 종착을 책임지는 역할엔 지장이 없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항은 터미널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라이어티하다. 에이프런에 서 있는 비행기는 또 어떤가. 거대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한 곡선에 혼이 빠져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불만이었던 이유는 출국 심사를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는데 흡연 구역이 하나도 없었..
하와이를 떠나는 날 아침. 공항에 갈 때까진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아침 산책을 나섰다. 아침 산책. 듣기만 해도 여유가 넘치고 평화로우며 그날 하루 전체를 의미 있어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무엇이든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마법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어렵다. 매일의 출근을 마법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듯이. 아침 산책이라는 걸 몇 번 해본 적도 없고, 그마저도 여행이나 가야 겨우 하곤 했던 나로서는 이 생소한 행위 자체가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장이오,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이 섬처럼 여유로운 사람이 되자. 하루라도 지속되면 다행인 그 수많은 다짐들. 거리는 벌써 관광객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저곳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대했던 산책의 묘미는 대번에 쭈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았을 때,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냥 그것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내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있을 땐 의미가 없지만, 모이면 ‘못다 한 이야기’라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된다. 불 꺼진 꽁초는 한 개비일 땐 쓰레기일 뿐이지만, 수북하게 쌓여있으면 그 어떤 곳이든 저 있는 곳을 재떨이로 만든다. 버려진 필터 조각들의 집합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도 ‘불필요한 것들의 사전’이 있다면 저마다 목차 하나씩을 차지하고 그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할 테니, 과연 다수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나에게 남은 하와이 이야기, 정확히 말하면 아직 소개하지 못한 장소가 몇 된다. 오하우 섬에 있는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돌 농장과 ..
해가 지고 밤이 되자 호텔은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방을 나섰을 때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복도는 잠잠했다. 해변이나 중심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 호텔 주변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 같은 소음이 오히려 적막감을 더했다. 나는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그걸 눈으로 보고 기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육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와 낯선 이가 서로가 있던 공간을 교환했다. 밤의 호텔에 친근한 미소와 낭랑한 인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눈인사만 주고받는다. 소리를 내지 않아 서로의 밤을 방해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그를 태우..
사람이 살다 보면 늦잠도 자고 약속도 놓치고 그렇게 하루 계획을 날리는 날도 있는 법이다. 아는 거라곤 쥐뿔도 없는 타지에선 말할 것도 없다. 평소보다 단단한 긴장감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아침잠이 많은 나는 나태를 이기지 못하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하와이의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에 가기로 한 계획은 좋았는데 잠들기 전 혼자 술을 너무 홀짝였는지 마지막 셔틀버스가 호놀룰루에서 출발하는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나고 말았다. 프리미엄 아울렛은 호놀룰루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보통 셔틀버스 아니면 렌터카를 이용한다. 물론 나에겐 둘 중 어느 것도 없었다. 난감했다. 다른 계획을 세워두지도 않았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홀로 일광욕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잠깐. 난 태우는 건 질색이다...
빅 아일랜드의 볼케이노 내셔널 파크 정상에 올랐다가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검은 땅을 달렸다. 좌우로 쫙 펼쳐진 흑색 사막이 파괴된 후의 세상을 연상케 했다. 여행안내서에선 “우주적인 풍경”, “달에 온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간 벌어질 거대한 사건의 예고편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마그마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멀리 흘렀는지 빅 아일랜드는 간척사업을 하지 않아도 절로 영토를 늘려가는 곳이다. 1970년대 깔아 놓은 아스팔트 도로가 1983년 분출 때 묻혀 일부만 드러난 광경을 봤다. 딱딱하고 단단해 보이는 아스팔트가 이토록 쉽게 잘려나갈 수 있다니, 재난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경외감이었다. 그런데 만물..
휑뎅그렁한 도로에 컨테이너로 만든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접시 대신 도시락 용기를 주고, 열 가지 중국 요리 중 세 가지를 마음껏 고를 수 있으며, 거기에 음료수까지 포함이다. 홀로 앉아 코코넛 소스에 빠진 새우를 포크로 찌르고 있으려니 끝없이 이어진 황야를 달리다가 외딴 휴게소에 차를 세우는 기분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 식당 건너편에도 컨테이너로 만든 가게가 하나 있는데 둘 다 황량한 대지와 잘 어울렸다. 내 취향이 그렇다. 컨테이너로 만든 단층 건물을 보고 있으면, 더군다나 그것이 식당이나 잡화점으로 쓰이고 있다면, 가슴 한구석에 작은 구멍이 뚫려 마음이 그쪽으로 쓸려 들어가듯 아득해진다. 마치 아름다운 회화 앞에 선 것처럼 그런 풍경을 오래 두고 보게 된다. 빅 아..
그저 주립공원일 뿐인데, 도시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 이곳은 마치 밀림의 한가운데 같다. 고사리 같은 양치류부터 기괴한 열대식물까지 일정한 패턴 없이 모인 다양한 나무들이 대지를 덮고 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자란 곳에선 식물의 축축한 숨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가고 있음에도 원시의 숲을 헤매는 기분이다. 눈앞에 늘어진 거대한 나무줄기는 나를 정서적으로 먼 곳으로 데려가려고 손짓하는 중이고, 어딘가에서 원시 생명체가 어슬렁거릴 거라는 무책임한 상상력도 여기에 동참한다. 문명의 힘으로 편하게 걷고 있지만 여기선 문명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리라는 착각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숲이 보물처럼 감추고 있던 아카카 폭포가 나타났다. 그것은 물안개를 허리에 두르고 간극이..
어떤 음악을 다른 사람과 함께 듣고 싶어지는 이유는자신의 감정을 전이시키는 데 음악만큼 빠르고 효과적인 매개체가 없기 때문이다.여기에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나 정서가 한껏 담겨있기도 하고,지금 상황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음악이 저 자신 안에선 일종의 화학작용을 일으켜현재 상태를 묘사할 단 하나의 표현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우릴 움직인다.그것은 블로그의 배경음악을 신중하게 고르게 하고,에스엔에스를 통해 듣고 있는 음악을 공유하게 한다.그도 아니면 옆 사람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네게 하거나.이는 참 매력적인 수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 멀리 있는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은 음악이 생겼다면그 노래는 여행 중의 당신을 정의할 것이다.훗날 그 음악을 다시 들었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종종 뚜껑이 열리는 기분을. 글자 그대로 카메라 뚜껑(사실 뚜껑이겠지만)이 열리는 바람에 감겨 있던 필름이 홀라당 타버릴 때의 그 기분을. 오 년이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닌데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그런 실수를 한다. 그것도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씩 저지른다. 필름을 교체할 때 물려있던 놈을 감지도 않고 필름실을 여는 경우가 제일 흔하고, 노출 보정 다이얼의 노브가 가방 끈에 걸려 빠지는 바람에 뒤판을 덜렁덜렁 열고 다닐 때도 있었다. 물론 여분의 필름을 몇 통씩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디지털만 사용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딴 데 팔리기 일쑤인데 꼭 중요한 순간에만 물려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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