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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행을 정의하는 많은 달콤한 말 가운데 알랭 드 보통의 이 한마디만큼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말도 없다. 덧붙여 그는 여행의 모든 운송 수단 중에서도 '기차'를 제일의 산파라고 말한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실제로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열차에서 내리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각주:1] 많은 사람들이 기차 여행에 낭만을 품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눈이 많이 내리던 빈의 마지막 모습.

  그런 연유에서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나 역시 기차를 타고 빈에서 프라하로 넘어가는 구간에 기대를 걸었다. 야간열차는 잠들기 바쁘고 밖이 보이지도 않지만 주간엔 다르다. 물 흐르듯 지나가는 전원의 풍경은 어떤 감상을 전해줄 것인가. 단순히 장소를 이동한다는 실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연한 여행의 연장이었다. 리드미컬하게 덜그럭거리는 차체는 명소를 거닐 때보다 더 많은 걸 하도록 요구한다. 뭔가를 끼적거리고 싶어 펜 끝을 입에 물거나, 어렴풋이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세상이 한가득 담겨있는 걸 보거나. 사진을 찍어도 움직이는 속도 때문에 이미지는 흐릿하게 번져있다. 순간순간 망막을 채우다 기억에 닿지 못한 채 잊혀지는 풍경이 사진으로 남는 것도 거부하는 셈이다.

열차를 기다리는 두근거리는 순간.

  프라하로 가는 길엔 눈이 내렸다. 설경은 철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기차 여행에서 보는 무상한 풍경 위에 눈은 하얀 통일성을 부여했다. 원했던 만큼 생각이 샘솟진 않았지만, 가져간 책을 읽을 여유는 생겼다. 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늦은 감이 있긴 했으나 캐리어에 내내 처박아 두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프라하로 가는 길.

  책은 감성이 넘치는 여행 에세이였다. 기차 여행에 퍽 잘 어울리는 소품이었는데 딱히 집중해 읽을 필요도 없었다. 나보다 먼저, 나보다 오래, 나보다 많은 곳을 다닌 작가의 소회를 읽으며 내가 느낀 바와 견주어 보곤 했다. 눈 덮인 풍광은 바람을 타고, 사진과 문장은 종이를 타고 흘렀다. 그의 옆에 앉아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불명확하고 사실보단 기억이나 인상에 의존하는, 한없이 주관적인 이야기를 말이다. 누구도 서로의 여행을 직접 경험할 순 없으므로 작가와 나의 대화는 제법 그럴싸했다. 상상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라지만, 때론 그 덕분에 관계가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열차 여행엔 커피와 노트를 함께.


  경을 넘어 프라하에 가까워질수록 승객도 늘었다. 만약 좌석을 예약하지 않았다면 곤란한(서서 가는)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빈-프라하 구간은 예약 필수 구간으로 기억하지만.) 처음엔 오스트리아와 체코 변두리의 모습에 관심도 기울이고 열차에서 파는 인스턴트 카푸치노도 마시며 여정을 즐겼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운행이 지연되면서부터 빠르게 저무는 해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면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낀 순간, 마치 오래 전부터 걱정했던 일처럼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프라하는 야경이 아름답다는 말조차 우리를 초조의 늪에서 끌어내진 못했다. 시간 앞에선 얼마나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지!

  열차가 프라하의 시내로 진입했다. 불안은 캄캄한 도시에 도착했다는 구체적인 현실로 변했다. 소중한 하루가 고스란히 날아갔다고만 여겨졌다. 열차에서 내리려는 발걸음은 다급했다.

  그런데 플랫폼에 발을 디디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멈춰있던 시간이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불안은 사라지고 기대가 되살아났다. 모든 건 플랫폼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을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굳이 옛 드라마의 이름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우리를 영화의 한 장면으로 이끌었다. 연인의 입맞춤은 길었다. 주변의 모든 공간을 낭만의 빛깔로 물들이겠노라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다. 재회의 키스일까, 아니면 이별의 키스일까. 보통 이별의 키스가 더 인상적이고 애틋할 것이라 생각하며 내심 그것이길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눈앞에서 두 남녀가 얼굴을 맞대면 재회의 순간인 경우가 훨씬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된다. 비로소 만났다는 안도와 감사,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랑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해방감. 격한 감정은 천천히 말랑말랑해지며 온 몸과 마음에 행복감으로 스며든다. 그러면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함께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동안 서로를 위해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이 모든 것이 상상이었을까? 아니다. 우린 곧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나눈 건 진짜 재회의 키스였다.

프라하의 연인들.

  1. 인용문 모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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