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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하의 중앙역인 Hlavni nádrží의 역사는 작은 공항을 연상케 한다. 외국으로 오고 가는 열차가 주로 이곳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렸다.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할 순 없었지만 그들이 끌고 가는 캐리어, 또는 등에 맨 배낭을 보면 길을 떠난 사람이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은 반도국에다가 분단국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생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우선 가지고 있는 돈을 체코화인 코루나로 바꿔야 했다. 역의 환전소는 환율이 안 좋다고 하여 남은 유로화도 소진할 겸 가지고 있던 30유로만 모두 바꿨다. 그리곤 24시간 교통 패스를 사려고 하는데 동전을 넣는 매표기 밖에 없었다. 환전 받은 건 모두 지폐인데 말이다! 뭘 사 먹고 잔돈을 바꿔 쓸까 했는데 24시간 패스가 딱 100코루나라서 그것도 좀 애매했다. 결국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경찰에게 지폐를 동전으로 바꿀 데가 없냐고 물어보니 그가 피식 웃는다. "It's simple." 그러면서 환전소에서 교환하면 된단다. 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정말 심플한 해결책이다. 물론 환전소 직원이 귀찮게 시리 왜 여기서 돈을 바꾸냐는 표정을 짓는 것까진 경찰이 책임져 줄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프라하 여행의 시작.

  텔이 있는 Křižíkova역 부근은 시내 중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어둠으로 초토화돼 있었다. 하지만 등불이나 다름없는 구글맵의 힘 덕분에 호텔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장을 풀고 구시가지로 향했다. 프라하의 지하철은 노선이 세 개밖에 안 되서 좋았다. 빈에 비하면 이곳의 교통은 얼마나 단순한지. Náměstí Republiky역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는데 난데없이 커다란 북소리가 들려왔다. 요상한 분장을 하고 복장까지 맞춰 입은 악단이 열을 지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울리는 흥겨운 리듬이 조용하기만 한 줄 알았던 프라하의 밤거리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노란 불빛과 둥둥거리는 타악기의 저음이 프라하에 잘 왔다고 환영해 주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열에서 떨어진 고릴라(?) 단원.

  귀 뿐만 아니라 눈도 즐거웠다. 수많은 기념품 가게가 화약탑을 지나 구시가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크고 작은 크리스털과 인형, 열쇠고리와 거울 같은 잡화들이 진열장 안에 가득했다. 보다 저렴한 기념품을 구하는 데 있어선 프라하가 앞선 세 도시보다 선택의 폭이 넓었다. 여행도 막바지겠다, 내일의 쇼핑을 기약하며 이곳저곳에 눈도장을 찍었다.

화약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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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시가 광장에 도착하자 이번엔 비트박스가 들려왔다. 광장 한 가운데 가설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실력은 그저 그런 한 힙합그룹이 그 위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광장 주변은 중세와 근대가 뒤섞인 고도(古都)인데 그 중앙에서 젊은이들이 랩을 하고 있으니 엄청난 대조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축제라도 열렸나 알아보자 지금이 '유로 카니발' 기간이란다. 사순절이 오기 전에 지내는 그 '카니발'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이들이 흥겹게 즐긴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까 역 앞에서 보았던 악단들도 눈에 띄고 축제는 우리가 프라하를 떠나는 날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여행 중에 현지의 축제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新舊의 조화.

구시가지 광장.

  요 관광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도시의 크기는 훨씬 작게 느껴진다. 빈이 그런 편이었고, 프라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시가 광장에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카를교였다. 하지만 거리가 짧다고 과정까지 부실한 건 아니었다. 카를교로 오는 길 구석구석에서 운치 있는 카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 지상의 작은 천국들은 오랜 옛날부터 커피 향을 풍기며 제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실로 서울의 내로라하는 카페 골목들을 소박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큼 꿈같은 길이었다.

카를교로 가는 길.


인적이 드문 길.

  사실 그렇게 도착한 까를교 조차 반 토막은 공사 중이었다. 유럽의 겨울 공사 시즌은 이젠 정말 코미디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카를교에 서서 강 건너편의 프라하성을 조망하자 다리쯤이야(?) 어떻냐는 '생각의 반전'이 일어났다. 커다란 엽서를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석 위에 조명을 비춰 광택을 더한 것처럼, 프라하성은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프라하를 찾은 이유를 딱 한 가지만 묻는다면, 모두 이 장면 때문이노라 답하리라. 다리의 난간 위에 카메라를 올려 야경을 담아보았지만 광각 렌즈가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다른 관광객들의 사진도 찍어주며 다리 초입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 카를교를 건너지는 않았다. 강을 건너 프라하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내일을 위해 아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추위와 피로 때문에 무지막지하게 배가 고팠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겠지만.

위치를 잘 못 잡은, 플레어도 생긴 첫날의 프라하성 야경.

  오는 길에 눈여겨 두었던 식당으로 돌아갔다.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이번이 두 번째다. 스프, 메인요리(훈제 돼지 요리), 사이드요리(감자 팬케이크)맥주가 같이 나오는 세트를 시켜 먹었다. 음식 가격은 확실히 다른 나라들보다 저렴했고, 맥주도 머리를 관통할 만큼 맛있었다. 요리 역시 괜찮았는데 어쩐지 한국에서 먹어 본 적이 있는 맛이긴 했다. 특히 세트에 포함된 Potato Pancake는 거의 감자전이었다.

색감이 좋은 식당.

Smoked pork, Potato Pancake, Beer.

  식당을 나와 구시가 광장에서 공연을 보다가 신시가지까지 걸어가 보았다.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만큼 구시가지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물론 마음에 드는 건 구시가 쪽. 그리곤 다시 Náměstí Republiky역으로 돌아왔는데 역 바로 앞엔 Palladium이란 이름의 세련된 쇼핑센터가 있었다. 파리의 포룸데알 이후로 현대적인 쇼핑센터는 처음이었는데, 가운데가 뻥 뚫린 탑 같은 구조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사람은 별로 없어 썰렁했지만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면 제법 인기가 좋을 것 같았다.

Palladium.

  여기서 지하철에서 겪은 인상적인 경험을 빼놓을 순 없겠다. 신시가 쪽에서 Náměstí Republiky역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때, 유니폼을 입은 애들이 입구부터 소란을 떨고 있었다. 처음엔 오늘 기분이 좀 좋은 녀석들인가 보다 했는데 플랫폼으로 내려가자 그런 이들이 수 십 여명으로 늘어났다. 연령대도 다양했는데, 역이 떠내려갈 정도로 큰 소리로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뭔가를 응원하고 돌아가는 길 같았다. 물론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의 팀이 이겼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심각한 마조히스트들이던가 거대한 안티 조직이 아니겠는가. 다른 팀 서포터즈(아마도 졌겠지)와 마주치자 이상한 소리도 주고받았다. 여기에 압권은 지하철을 타고 나서였다. 역 안에선 안전의 위협을 받을 일까진 없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심지어 운행 중인 열차 안에서도 발을 구르며 구호를 외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차게 뛰어오르던지, 지하철이 그렇게 흔들리는 건 난생 처음 느껴봤다. 레일이 무너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쯤 되자 종목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한 아저씨에게 무어보니 하이스 하키라고 한다. 프라하를 조용한 도시로만 여겼었지만 이로써 반나절도 안 돼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은 열정적인 사람들이 사는 도시였다.

환호하라! 소리쳐라! 그들은 승리했다!

PS.
  호텔로 돌아와 씻고 건너편의 편의점 간은 가게에서(새벽까지 하는 가게는 큰 마트 빼고는 유럽에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맥주와 콜라를 사 마셨다. 내일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자 시원섭섭했다.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핑크색 캡션 사진은 fujifilm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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