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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색色을 위한 찬가


는 단어가 많지 않거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구름을 흰 것과 회색인 것, 또는 큰 것과 작은 것으로밖에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심지어 '있다' '없다'로 분간하는 게 최선인 사람마저 있을지 모른다. 183개의 회원국과 6개 지역이 참가하는 세계기상기구(WMO)에서 구름의 종류를 크게 열 가지로 분류한 노력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범세계적인 기구에서 글과 그림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구름의 분류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지금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어디에 속하는지 맞출 확률은 굉장히 낮다. 어지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 놀랍도록 천진난만한 수증기 덩어리들의 이름을 알아내기란 만만찮은 일이 아니다. 너무 익숙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실상 이름도 제대로 불러줄 수 없는 서먹한 존재였던 셈이다. 여기서 갑자기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는데, 심지어 그런 일들이 매우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떤 작가가 지금까지 막연하고 두루뭉술하게 알던 무언가를 섬세하고 신선한 단어로 표현했다고 하자. 그 표현이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면 동시에 그가 묘사한 대상을 지금까지 얼마나 소홀하게 대해왔는지도 자각할 수 있다. 진부한 주제를 새로이 조명하는 무대에 초대받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어떤 사물이나 장소, 인물이나 그 인물의 생각 등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심하게 대했던 대상이 절로 커다란 의미를 지닐 때도 있다. 그 누구도 인도해 준 적이 없는데 절로, 갑자기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말이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자신 안에 그것을 위한 새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태가 온다. 그럴 때 우리는 빈약한 표현을 주섬주섬 꺼내 현재의 상태를 묘사한다. 감동을 받았다느니 눈이 새로 뜨여졌다느니 하는 말이 입가나 생각의 언저리에 맴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성의 없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이 주로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이나 갑자기 찾아온 사랑 앞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대한 작가들도 비슷한 상황 앞에선 말을 아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딘 감각이나 관심사에 침입해 들어와 자신을 다른 눈으로 봐달라고 요구하는 대상 앞에서 익히 알던 형용사나 부사만으론 그들을 맞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좌절했는지.
  
나 역시 어휘의 부족이나 지식의 빈곤, 일찍이 외출한 관심 때문에 마땅히 표현해야 할 삶의 일부를 그냥 흘려버렸음을 고백하고 싶다. 더불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아름다움과 맞닥트렸던 순간까지도. 팔라우의 바다 앞에서 그 빛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나는 바로 그런 막다른 골을 마주하고 있었다.


  부분의 관광지가 바다에 있는 팔라우에선 20명 정도가 함께 탈 수 있는 모터보트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시내버스조차 없는 섬 안엔 자전거나 자동차, 또는 두 다리가 이동수단의 전부지만 바다로 나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야마하 V6 200 쌍발 엔진을 단 이 날쌘 배들은 시속 60킬로미터에서 80킬로미터의 속도로 관광객들을 수송한다. 관광객들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대번에 바다에 공양해 버릴 듯한 강한 바람을 이겨내며 목적지인 자이언트 락 아일랜드나 트리플 락 아일랜드를 상상한다. 자이언트라느니 트리플이라느니 하는 단어가 낭만적인 느낌을 주진 못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팔라우로 날아오는 주된 이유가 그곳에 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세 줄기의 꼬리를 달고.
 

   
쾌속정을 타고 바다를 가르는 경험은 특히 마음이 답답한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파도가 잠잠하지 않으면 배는 - 과장을 덧붙여서 -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을 치고 승객들은 연방 바닷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하지만 모터의 굉음과 머리카락과 얼굴을 축축하게 만드는 바람과 총알처럼 날아드는 바닷물을 몸으로 직접 받아내다 보면 자동차나 비행기에선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수평선이 낳은 하늘과 바다 위엔 어떤 장애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야가 트이니까 조금씩, 그러나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히 움직이는 여름 바다의 풍경이 더 생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가이드의 권유(?)로 자리를 옮겼다. 팔라우 보트의 일등석은 바로 이물이었다. 뱃머리에 앉아 아예 배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몸을 고정하자 전신이 노출되는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 위를 걷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 내 몸과 바다가 가까웠다. 눈을 뜨면 남태평양의 자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을 감으면 거칠 것 없는 바람과 발바닥으로 튀어 오르는 바닷물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가 그곳에 있었다.
  
그 때, 첫 목적지인 자이언트 락 아일랜드에 가까워졌다. 배가 속도를 줄인다 싶자 바다가 변하기 시작했다

  
수심이 얕은 바다와 깊은 바다의 색깔 차이는 극적일 정도였다. 산호섬 주변으로 땅이 올라오면서 반사될 만큼 힘을 얻은 햇빛이 조화를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선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뚜렷한 바다의 경계선을 지나며 지금의 인상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려면 당장 뭐라도 끼적이거나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매혹적인 바다의 색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내가 곤혹스러웠던 이유는 감탄은 하면서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수백 가지 색이 넘실거린다.

   
지금까지 하늘을 파랗다고 말했다. 바다도 파랗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늘색과 바다색이 같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는 색 이름을 반투명한 플라스틱 필름이라고 생각하며 눈앞의 풍경에 이것저것 대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가 같고 뭐가 다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색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감수성은 내 안에서 가뭄을 맞았다. 울적한 기분이 들며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고, 문득 감성이 따르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동안 산업의 여러 분야에서 널리 이용된 시스템으로 말이다.  
  1905
화가이자 교수였던 앨버트 H. 먼셀은 약 7년간의 연구 끝에 정확하게 색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인 표현법을 발표했다. 이후 몇 번의 개정을 거쳐 '먼셀 색체계'로 널리 알려진 이 시스템은 특히 색과 관련된 다양한 산업에 이바지를 했다. 색상, 명도, 채도의 세 축으로 이뤄진 먼셀의 색 체계에 따르면 가장 일반적인 파란색은 '2.5PB 4/12'라고 한다. P는 보라색(Purple)이고 B는 파란색(Blue)이다. PB는 보라색과 파란색의 중간색인 남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에는 그 정도를 나타내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붙는다. 먼셀이 세운 기준에 의하면 5가 가장 그 색상다운 색이다. '2.5PB'는 남색에서 좀 더 파란색(B)에 가까운 색이라고 할 수 있다. '4/12'에서 4는 명도, 즉 밝음과 어두운 정도를 나타내고 12는 채도, 색의 순수한 정도를 나타낸다. 명도는 제일 어두운 1에서 제일 밝은 10까지, 채도는 가장 바랜 1부터 가장 순수한 12까지 단계가 나뉜다. 결국 사전에서 말하는 '표준의 파란색'은 남색보단 파란색에 가까우면서 흰색과 검은색을 기준으로 하면 중간값보다 약간 어둡고, 그러면서도 빛이 전혀 바라지 않은 특정한 색을 말하는 것이다.

먼셀의 색 체계[각주:1]
 

  
하지만 이런 복잡한 공식을 뒤집어 보면 이 무한한 색의 영역에서 사람마다 각기 파란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하늘을 보고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청록(BG:BlueGreen)을 이용 10BG 6/8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 옆의 사람은 2.5B 7/8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바람이 불어 찰랑거리는 깊은 바다의 표면이 7.5BG 2/4 10G 6/8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간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훨씬 좁거나 훨씬 넓은 범위의 색으로 느껴질지 모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결국 수학적인 색체계는 디자인, 출판, 사진 등의 영역에서 정확한 색을 공유하는 도구는 될 수 있겠지만, 실제 자연의 색에서 얻은 인상을 표현하는 덴 한계가 있었다. 자연의 색은 이차원의 색보다 훨씬 풍부하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 개로 세분된 색은 해석의 여지가 큰 대상을 내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사람은 선택지가 다양할수록 자신이 고른 답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애를 써서 딱 맞는 기호를 찾았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콧방귀 하나 안 뀌며 잘못 골랐다고 핀잔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어휘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사전과 색상표를 뒤적거리며 평소 잘 쓰지 않던 색 이름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껏 너무 많은 색깔을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같은 크고 단순한 범주 안에 몰아넣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을 세 부류나 네 부류로 나누는 게 적당하다는 시각처럼 말이다. 이제 도매가로 팔려나갔던 색깔들이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어휘의 자산 목록에 구멍이 나고 통나무 같은 눈썰미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원초적인 자연 앞에선 펜이나 붓 하나는 들어야 마땅했다. 아쿠아마린(연한 청록색), 페일 그린(갈맷빛), 파우더 블루(파스텔 톤의 흐린 파랑) 따위의 오묘한 색들을 적재적소에 대고 불러줄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색을 구분하고 그것의 이름을 아는 노력은 (물론 당신이 화가나 디자이너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걸 자랑스럽다 위로해 주기도 어렵다. 아는 색깔이 몇 안 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그 색깔로만 보다가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하지만 더 나아가, 아름다운 바다를 마주하는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그저 몇 개의 단어 안에 짜맞추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색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그 빛깔을 이름으로 삼았음을 눈치채야 한다. 하늘색이라느니 풀색이라느니 벽돌빛이라느니 하는 많은 말들은 결국 색이 비유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이 저마다 정열, 냉정함, 호기심, 게으름 같은 인격을 부여한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팔라우의 바다색을 묘사하는 가장 쓸만한 방법은 무언가에 비유하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햇빛이 조금씩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변하는 자연의 색을 묘사하는 건 결국 우리의 느낌, 우리가 받은 인상, 우리가 그 안에서 이끌어낸 비유처럼 주관적인 판단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변, 그림자.


  
의 이물에 앉아서 나는 포기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어둔 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사진의 힘이 강력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가끔 그것이 방해가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팔라우의 얕은 바다색을 보며 직관적으로 떠오른 단어는 '에메랄드 빛'이다. 엄밀히 말하면 바다는 찬란한 청록색에 가까웠지만 에메랄드(선녹색)란 말이 먼저 떠오른 이유는 그것이 잘 알려진 보석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보석에 조명을 비춘 것처럼 햇살을 받은 물 위로 수많은 마름모꼴 별이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액체로 된 보석이 존재한다면 팔라우의 바다가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아니, 도리어 물처럼 흐르는 보석이 팔라우의 바다를 닮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옥, 즉 아쿠아마린(aquamarine)이란 보석이 청록색이다. 그 이름이 바로 이런 얕은 바다에서 비롯됐을 것이란 추측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오점 하나 없이 맑은 물빛이란! 분명 바다는 담록, 담청, 청록색으로 가득 차있는데 한편으론 마치 아무 색도 없는 투명한 물처럼 느껴지는 모순된 광경이 자꾸 말문을 막히게 했다. 산호와 해초와 바위 그리고 열대어들의 윤곽이 명확하게, 그들의 그림자까지 드러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호수를 거울에 비유한다면 산호섬의 근해는 해저와 하늘 사이의 창문이었다. 아무것도 숨길 게 없는 결백한 사람이 자신의 속내를 쏟아내는 것처럼 바다는 빛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세계기상기구에서 적운, 우리말로 쌘구름으로 분류한 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자연이 빚어낸 원색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마치 이 세상 빛깔이 아닌 것만 같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낯설다고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바로 내 발밑의 바다에서 나오고 내 발밑의 바다를 닮으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롱비치에서.


canon A-1 + 24mm
proImage 100


  1.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Munsell-system.svg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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