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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에세이] 2011 유럽 여행기 (0) - 주마간산(走馬看山) 보러가기

1.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똑같은 골목, 똑같은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을 때 울리는 똑같은 인사말도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땐 평소보다 특별하게 느껴진다. 묵직한 캐리어와 손때 묻은 여행책자는 신문이나 휴대전화에 몰두해 있는 옆 사람과 전혀 다른 운명을 예고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 도시, 이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자기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희망과 기대가 빚어낸 이런 묘한 감정은 어느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비추는 햇살을 볼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 말이다. 갑자기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머리를 아프게 하던 근심이 미안했다며 화해를 청해 온다. 그렇다. “지금부터는 지금까지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온화하게 웃던 세상은 뾰족한 송곳니와 함께 잔인한 본색을 드러내겠지만, 잠깐이나마 충만한 기분을 누리면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려는 시도는 해 볼만 하다.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오후의 불쾌한 처지를 이겨내듯, 지루하고 피곤하게만 느껴지는 여행 중간에 내가 이곳으로 떠나오며 어떤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나 떠올리는 처방이 필요하다. 스스로 기특하기까지 했던 집을 나서던 순간으로 돌아가 궂은 날씨와 살인적인 물가에 치인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다. 종종 여행 자체보다 버스나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걸었던 최초의 여정이 더 인상적인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2.

 
 
공항철도는 언제나 편안하고 무미건조한 풍경으로 나를 여행의 첫 번째 관문에 인도한다. 대체로 공항과 도심을 잇는 길이 다 그렇다.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과 북역을 잇는 RER-B선은 파리 외곽 지구의 슬럼가 같은 풍경을 통유리에 영사한다.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는 커다란 광고 전광판을 네다섯 개는 지나치게 된다.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어떤가? 이천년이 넘은 옛 도시에 간다기보단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양재IC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난 경부고속도로의 천안과 서울 구간이 좋지만.) 프라하의 중앙역에서 프라하 국제공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도 앞선 도시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나마 가장 좋았던 곳은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공항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였다. 활시위처럼 매끈한 고가다리를 지나 바다를 건너며 보았던 섬의 윤곽은 산업단지와 대조를 이루며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 공항으로 가는 모든 길이 공유한 한 가지 특징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대체로 건물들이 키를 낮추며 평야와 그보다 더 넓은 하늘에 자리를 내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엔 유유히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 한 대가 있다. 이보다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기술이 또 있을까? 불과 몇 시간 후면 자신도 유선형 기체에 탑승해 구름을 뚫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튼다. 온갖 잡다한 걱정은 이미 특급 여객기를 타고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사라진 후다.


3.
 
토요일 오전 10 20. 인천공항엔 사람이 별로 없다. 역사는 거대하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는 고속철도 역이나 버스터미널 같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한가함 때문에 빚어진 오해다. 이곳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국제공항이고, 우리가 그런 평판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팔불출이란 소리를 들을 걱정은 없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국제공항협의회(ACI)로부터 공항서비스 부문 6년 연속세계최우수공항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기억한다 해도 지나친 애정은 아닌 셈이다.


 
인천국제공항의 프로젝트를 맡았던 건축가 커티스 펜트레스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천공항의 가장 큰 장점으로 편리하고 편안하다는 특징을 꼽았다. 인천공항의 터미널은 실제론 거대하지만, 여행자들에겐 그렇게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는 수평과 수직이 균형을 이룬 인천공항의 구조 덕분이다. 지하 1층엔 편의 시설을, 1층엔 도착 터미널을, 그리고 3층엔 출발 터미널을 배치하고 곳곳에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난 아직도 공항 터미널 2층엔 뭐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숨겨진 암호를 대거나 9 3/4 승강장으로 뛰어들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물론 당신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출발 터미널의 A 카운터에서 M 카운터까지 걸어보지 않고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13개의 알파벳 사이를 걸어보았고(그것도 왕복으로), 시간만 충분하다면, 우리에겐 운동이 필요하다고 대답하고 싶다.
 
어쨌든 편리한 공항 체계 덕분에 지하 1층과 3층을 오가며 미처 챙기지 못한 준비물들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하드 렌즈의 세척과 보존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렌즈 용액과 1회용 면도기, 휴대전화에 전력을 공급할 멀티 어댑터 같은 것들이다.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답게 공항의 물가는 상당히 비싸다. 차라리 이럴 땐 체인화 된 대형 마트나 편의점을 찾는 편이 낫다. 크리스마스이브엔 비싼 가격이 적힌 메뉴판을 은근슬쩍 들이대지 않고 지금껏 팔던 가격을 고집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는 편이 싸게 먹히는 경우처럼.

4.
 
그러나 공항의 상업적인 면이 극에 달하는 건 보안구역을 지나고 나서다.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는 것이 마음껏 지갑을 열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착각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안검색대를 보다 저렴하게 사치품을 살 수 있는 쿠폰 발급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직 비행기는 뜨지도 않았는데 면세점이 좌우로 즐비한 터미널엔 이제 누구도 자신을 막지 못한다는 해방감이 넘쳐흐른다. 물론 처절할 만큼 붉은 숫자로 점철된 가계부는 요동치는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너덜너덜한 장부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험 감독관처럼 우리의 등 뒤에서 꼼짝 않고 서있다. 우리는 보석과 시계와 명품 가방 매장에선 머뭇머뭇 거리다가 담배와 주류 매장으로 향할 때가 돼야 그나마 걸음이 가벼워 진다. , 마음먹고 400달러가 훨씬 넘는 고가품을 사도 귀국하는 순간 세관이 자신을 조용히 부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역시 절제에 한 몫 할 것이다.
  
하지만 면세점이라는, 마음껏 소비를 조장하는 환경에도 유익한 면은 있다. 잠깐이나마 결제를 고려하는, 또는 결제를 고려한다고 생각하는 짜릿한 순간을 누구나 공평하게, 그것도 바깥세상보다 저렴한 만큼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며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종착지나 여행 목적, 보유 자산과 당장 오늘 입은 옷에 상관없이 면세 구역을 이용할 수 있는 똑같은 자격을 갖는다. 이곳엔 고전주의인지 모더니즘인지 알 수도 없는 장식으로 치장한 백화점 명품 매장처럼 고압적인 분위기가 없다. 보안 구역을 통과하면 그냥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만약 따로 출입문이 있는 부속 건물에 모든 매장을 몰아넣었다면 이렇게까지 장사가 잘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 휩싸여 전혀 살 마음(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반짝이는 귀고리나 시계가 나의 관심을 끈다면 특별히 지갑을 열겠다는 표정으로 매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점원은 내가 연기를 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머쓱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는 꼭 필요한 절차를 밟는 것처럼 담배와 주류 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온실 같은 느낌을 주는 흡연구역이 마음은 편했다. 자동문을 빼면 거의 완벽하게 실내를 밀폐시키는 커다란 유리벽 너머로 무빙워크와 식수대, 화장실 픽토그램 따위가 보였다. 이곳엔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인다. 이들은 자기 몸을 갉아먹으며 잠깐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불을 빌리며 친밀감을 형성하고 처음으로 물건보다 사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쇼핑센터에서 달리 할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긴장을 풀고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빈둥거리기에 딱 좋은 곳인 셈이다. 그래서 난 무거운 보조 가방도 옆자리에 내팽개치고 마음껏 이곳의 존재 이유를 태우고 또 태웠다.


5.
 
항공사에겐 안 된 일이지만 비행기는 삼분의 이도 차지 않았다. 덕분에 맨 우측 줄 세 좌석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는데 창문이 없는 자리라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글자 그대로운신의 폭'이 넓은, 다시없는 행운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이륙이 30여분이나 늦어진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득, 비행기 옆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앉는 걸 싫어하셨던 어머니 생각이 날 뿐이었다.
 
중력은 욕심이 많아서 땅 위의 피조물들이 자신을 벗어나는 걸 참지 못한다. 그런데 이번엔 먼저 뜬 비행기들을 잡아당기느라 힘을 다 썼거나, 뒤에 뜰 더 중요한 비행기들에 관심이 쏠린 탓인지 너무 쉽게 우리를 놓아주었다. 전신이 확 밀리는 느낌이 평소보다 덜 했던 것이다. 내 옆엔 그저 꽉 막힌 벽 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내 반대편 창문을 통해 사선으로 물러가는 땅의 흔적을 쫓았다. , 이천, 삼천, 스크린 속에서 비행 고도가 올라가는 것만큼 매끄러운 이륙이었다. 비행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몇 시간 후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 위를 날아갈 땐, 무시무시한 가속의 힘 덕분에 고도 만 미터가 넘는 상공에서 시속 90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실제로 고도는 10,668m, 속도는 시속 879km였다.)
 
일단 비행이 안정권에 들어가고 나면 좁고 좁은 이코노미석은 아주 개인적인 공간이 된다. 각자의 자리에 준비된 스크린과 씨름을 하거나, MP3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꼽거나, 공짜로 얻은 신문을 읽거나 하면서 비행시간과의 길고 긴 싸움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누군가와 물리적으로는 불편할 정도로 가까우면서 심리적으로는 옆방에 있는 것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새로운 차원이 지배하는 곳이다. 옆 자리에 앉은 일행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을 순 있겠지만 대화는 채 한 시간을 가지 못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할 이야기도 없거니와 기내엔 침묵을 요구하는 모종의 분위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탁하고 건조한 공기를 마시며 잠에서 살짝 깨어날 때면 모처럼 들려오는 대화소리가 반갑게 느껴진다. 이 어두운 공간 속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것이다.

6.
 
그런데 개인적인 공간에 몰입하기 전 치러야 할 의식이 하나 있다. 식사 시간이다. 승무원이 갑자기 뜨거운 물수건을 돌린다면 그건 이제 곧 기내식이 나온다는 뜻이다. 오늘은 미리 메뉴판도 받았는데,  TV쇼에 출연했고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식당도 운영하는 유명한 요리사의 얼굴이 전면을 장식했다. 그는기내식의 즐거운 경험"을 함께 하라면서 믿음직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고를 수 있는 메뉴는 두 개 뿐이었지만 간결한 설명을 덧붙여 놓음으로써 좀 더 대단한 요리를, 우리가 대접받아 마땅한 요리를 먹게 될 것이란 기대를 부풀렸다. 아랍에미리트의 항공사가 그들이 최근 사들인 거대한 비행기에서 칠성급 호텔에 버금가는 안락함을 느껴보라고 자랑하듯, 여기선 하늘을 나는 식당에 초대받은 것 같은 간접 경험을 선사하려는 모양이었다.


  
승객들은 양식이나 한식을 고를 수 있었다. 상세한 네 줄의 설명이 붙은 양식과 간단한 두 줄의 설명이 붙은 한식 중 어느 쪽에 구미가 당길 것인가. 이제 막 외국으로 떠나는 한국 사람이라면 한식을 고르는 게 어렵지 않을까? 미리 현지식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는 건 물론, (대체로 기내식은 맛이 없다는 걸 고려한다면) 우리 음식엔 어쩐지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한식은 기내식으로 나오기 좋은 음식이다. 밥이 좀 차갑더라도 고체를 지향하는 소스 때문에 퉁퉁 분 면이나 껍질이 눅눅해진 튀김보단 본래의 맛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선 비빔밥을 먹었는데 햇반과 고추장만으로도 익숙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 줄에 이르는 설명과 스타 셰프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에 양식을 고른다.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갖출 건 다 갖췄는데 일반 레스토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나온다는 것이다. ‘데친 새우와 오징어 그리고 미도리 드레싱천천히 조리한 닭가슴살과 양파 퓨레 그리고 마데이라 소스'가 플라스틱 식판 위에 정량으로 담겨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미래의 식단을 미리 보는 듯, 아주 매혹적이었다.
 
요리는 기대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닭가슴살은 전혀 질기지 않았고 마데이라 와인과 데미 글라스 소스를 첨가해 만든다는 마데이라 소스도 좀 굳어서 나온 것만 빼면 고기와 잘 어울렸다. 특히 푸딩 비슷한 무언가로 보였던화이트 초콜릿 파나코타가 입맛에 잘 맞았다. 절대 미식가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나로선 사전을 뒤지고 나서야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정성을 들이고 좋은 재료를 쓴 요리들이었다. 하지만 기내식 특유의 미묘한 맛은 여전했다. 새우도, 오징어도, 체리토마토와 닭가슴살도 모두 자연에서 온 재료인데 비행기 위에만 오르면 인공적인 맛을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꼭 그들을 담고 있는 플라스틱 용기에서 자라난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소화가 잘 되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기내식을 먹으며 스크린엔톰과 제리'를 틀어놓았다. 나만의 트레이, 나만의 화면 앞에 앉아 있자 혼자라는 느낌이 막 뿌린 향수처럼 진해졌다. 집에 아무도 없는 오후, TV 앞에서 밥을 먹으며 만화 영화를 보던 어릴 적 기억도 겹쳐졌다. 사실 그 기억이 톰과 제리를 틀게 만든 것인지 톰과 제리를 틀어서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선후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때나 지금이나 -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돌연 찾아온 향수鄕愁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최근에 장편으로 다시 제작된 이 추억의 만화영화에서, 우리의 작은 제리는 너무 변해 있었다. 얇고 긴 속눈썹과 애교 섞인 웃음, 놀랄 때 마다 조심스러워지는 몸짓. 문득 제리는 원래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렸을 땐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의심이었다. 어쨌든 옛 친구의 변한 모습과 옛 친구를 바라보는 내 시각의 변화가 그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 적잖이 마음이 아팠다

7.
 
식사시간이 끝나고 나면 승무원들은 더 바빠지는 것 같다. 카트도 없이 자리마다 커피와 홍차를 권하고 다녀야 하고, 친절함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사소한 이유로 호출 버튼을 눌러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영업도 책임져야 한다. 배가 부르면 지상에서 충족되지 못한 소비욕이 되살아나며 면세품 카탈로그에 손이 가게 된다. 상품마다 각국의 화폐로 환산한 가격을 꼼꼼하게 표기한 이 책자는 광고 반 기사 반인 시중 잡지보다 오히려 재밌다. 여기엔 순진할 정도로 오직 한 가지 목적만 존재하며, 따라서 가식도 찾아볼 수 없다. 면세품들이 철망 달린 카트에 가득 실려 통로를 활보하고 기내 면세점을 이용해 보라는 낭랑한 목소리가 흥을 돋운다. 십 수 년 전, 남대문 시장에서 들었던골라! 골라!” 하는 구성진 고성이 전혀 다른 주인공으로 리메이크 된 것 같았다. 나는 공항 면세점과 책자와 카트로만 존재하는 기내 면세점 간의 차이를 발견해 보려했다. 누구도 남대문 시장에서 손님을 모으는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상업적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그건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탈로그를 들고 모델처럼 걷는 여성들 역시 남대문 시장의 좌판 아저씨가 풍기던 인간미를 일부 공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처로운 마음도 감출 수 없었다. 승무원은 직장인이라기 보단 직업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교사나 간호사 같은 존재였다. 분명 어딘가에서 월급은 받고 있겠지만,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상징성에 더 무게가 실린 존재 말이다. 어린아이가 장래희망 발표 시간에 품었던 막연한 상상이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일까. 병원이 간호사를 고용하는 게 아니라 간호사가 기꺼이 환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며, 항공사가 승무원을 선발하는 게 아니라 승무원이 기꺼이 비행기에 올라 승객을 돌보는 것이란 환상. 그런데 이제 그들의 고용주를 위해 면세품을 권하는 승무원을 보고 있자니, 우리는 모두 한 배, 아니 한 비행기를 탄 운명이란 게 명백히 드러났다.
 
면세품들이 10F 33C 같은 미지의 좌석으로 끊임없이 옮겨졌다. 우리는 서로 재화와 용역을 사고팔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일일까 궁금해졌다.

 
물론 승무원과 승객 사이엔 금전적 관계 이상의 교류도 있다. 그들은 때가 되면 물과 오렌지 주스를 들고 나타나 목을 축이게 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귀찮은 부모를 대신해 어린아이를 화장실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승무원의 표정을 보면 단순히 연습만으로 나올 수 있는 친절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쉴 새 없이 통로를 돌아다니며 승객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그들을 보라. 우리가 가만히 앉아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돌봐주고 있는 것이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달리 하는 일도 없이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우리를 위해 그들은 가끔씩 간식을 돌리고 소금에 절인 튀긴 땅콩 한 봉지를 건네는 것이다.
 
승객이 지불한 항공료엔 이 모든 친절의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겠지만 우리가 진정 타인의 친절을 살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신과 나 사이에 재화가 오고간다 하더라도 당신은 진심으로 나를 환대할 수 있고, 나 또한 진심으로 당신의 배려에 고마워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폐나 신용카드에 대한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진다. 그것이 우리가 삶이라는 크고 건조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서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인 것이다.


8.
  비행시간이 길어질수록 혼자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책을 읽다가 음악을 들으며 풋잠에 들고, 영화를 한 편 보기도 하다가 여행 수첩을 채운다. 시종 집중을 못 하는 사람처럼 그 모든 일을 번갈아 해 본다. 휴대전화나 컴퓨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너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냐고 누군가 푹 찌른 것만 같다. 하지만 이렇게 생산성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이 장시간의 비행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비록 뭔가를 벌어들이거나 성취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당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덴 탁월한 효능이 있는 그런 일들 말이다. 여행지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에 자극을 받아 샘솟는 생각만큼, 지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최소한의 활동만으로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 역시 스스로를 일깨우는 좋은 밑거름이 된다.

 
예를 들어 독서는 다음과 같은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에 관한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를 두 번째 읽으며 내가 나의 직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니 그 직업을 가진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가늠해 보았다. 처음 책을 읽을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일을 가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지금, 직장에 다니면서도 결국 그 때의 의문을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의 말처럼 일이 삶의 형이상학적인 고민으로부터 피신하게 해 줄진 모르지만, 대신 형이하학적인 걱정을 잔뜩 안겨준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했을 뿐이다. 여행을 주제로 멋진 이야기를 선사했었던 드 보통은 일에 관해서도 납득할 만한 분석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여행 중'이면서 동시에 '일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그가 제시한 소재의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사회 초년생이 비행기에서 책을 읽으며 풀지 못한 의문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며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도록 그의 신경을 박박 긁어대고 있다. 이 모든 건 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 준 비좁은 좌석과 남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수많은 동행자들 덕분이다.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지루할 수도 있었을 이 시간에 감사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영화를 보거나 그도 아니면 석상처럼 멈춰 창밖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걸로 미루어 보아, 런던으로 가는 열한 시간 반 동안 삼 백여 개의 좌석 어딘가에선 이번 장거리 비행을 즐거운 사색의 시간으로 기억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9.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들을 해도 갑자기 집중력이 떨어지며 주의가 분산되는 순간이 온다. 잠도 오지 않는데다가 땅에 놔두고 온 걱정거리만 머릿속에 잔뜩 맴돈다. 폐쇄된 공간에 혼자만 있다는 기분.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에 치이고 있다는 기분. 어느 쪽이든 숨막히게 답답한 심정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그 기분. 그럴 땐 맥주나 와인 한 잔을 주문한 뒤 사열 받는 병사처럼 쭉 늘어선 좌석을 옆으로 쓸어 담는 상상을 해 본다. 분주히 움직이는 승무원들이 무대 뒤편으로 퇴장하고 한 번에 많은 승객을 태울 필요가 없는 비행기로 자리를 옮긴다. 통로는 지금보다 훨씬 넓어지고 사람들은 벽면에 마련된 디저트 바를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걸 먹고 마시고 싶은 걸 마신다. 스피커에선 기분을 들뜨게 하는 음악이 적당한 음량으로 울린다. 천정엔 미러볼 대신 빈 새장이나 토성 모형 같은 게 달려있음 좋겠다. 하늘 위의 파티가 될 그 장면에서 사람들은 머나먼 땅으로 떠나는 이유, 오랫동안 못 본 가족이나 애인을 만난다든가, 반대로 가정과 일터에서 도망친다든가, 성사시키지 못하면 자리가 위태로운 협상을 하러간다든가 하는 각자의 이유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에 내리지 않고 계속 하늘 위에 살며 중력 같은 온갖 속박을 잊은 채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될 것이다. 창문 덮개를 올리면 자홍색으로 부푼 구름이 긴 여정 함께 하자며 따라오는, 천국과 가장 근접한 세상에서 말이다.


10.

  
착륙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나온다. 톤을 낮춘 목소리로 도착지의 현재 날씨와 기온(맑은 날이며 영상 십도를 웃돈다고 한다.)을 일러주는 기장의 멘트가 발밑의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우중충한 하늘과 안개부터 떠오르는 런던이 맑은 날씨라니, 과연 어떤 인상일까? 이미 런던의 하늘에 파묻혀 날고 있지만 굳이 지상에서 올려다 볼 풍경이 궁금해진다. 하늘 위의 삶은 결국 짧은 꿈에 불과했고, 나는 땅의 동물답게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울해 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강하는 속도만큼 나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의 첫머리, 여정의 첫 토막이란 명목 하에 땅 위의 모든 크고 작고 거창하고 시시한 일들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관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있어야 하는 장소와 나를 옭아매는 관계와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1.
 
우주선 같은 공항 청사의 지붕 올려다보기. 면세점에서 자본주의와 소비욕에 대한 두서없는 비판하기. 이륙하는 순간이 짜릿해서 좋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 개인 스크린의 모든 메뉴를 다 눌러보기. 비행기가 지금 어디쯤 날고 있나 지도 탐색하기. 기내식 즐기기. 흡연이 가능한 화장실이 딱 한 곳이라도 있음 좋겠다고 생각하기. 깜빡 잠들기. 아끼고 아껴서 물 마시기. 열악한 화질의 영화보기. 책 읽기. 메모하기. 이 여행이 끝나면 좀더 나은 사람이 되 있지 않을까 김칫국 마시기. 아직 찾아오지 않은 미지의 풍경과 아직 벌어지지 않은 깜짝 놀랄 사건이 있기에 이 사소한 행위들은 고된 장거리 비행도 견딜만 한 시간으로 바꿔 놓는다. 아니, 이 사소한 행위들이 있기에 장거리 비행은 여행의 모든 순간 중에서 제일 빛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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