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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하와이의 섬 중 제일 크다는 이유로 빅 아일랜드라고 불려. 사실 이 섬의 진짜 이름이 하와이지만 많은 사람이 와이키키 해변이 있는 오하우 섬을 하와이라고 생각하지. 섬이야 저를 뭐라 불러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본명을 잃었다고 슬퍼지는 건 감정이입을 잘하는 인간만의 속성이겠지.


 
빅 아일랜드엔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활화산이 있어. 이곳의 산은 해발이 높지만 능선은 젖무덤처럼 완곡하고 부드러워. 구름이 드리워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의 동산처럼 보일 정도야. 6인승 승합차를 타고 화산 국립공원에 올랐어. 고도가 높아질수록 활엽수가 고개를 숙이고 침엽수가 늘어나. 어쩐지 풍경도 삭막해져, 다시 살아나기 어려운 중환자처럼. 그러다가 드디어 사시사철 수증기가 올라오는 분화구를 볼 수 있는 거야. 정말 거대한 구덩이지만 너무 멀리 있어서 누군가 그 속에서 장작불을 피우는 것 같아. 내 안일한 생각을 읽었는지 가이드는 이곳의 여신이 언제 변덕을 부려 용암과 화산재를 토해낼지 모른다고 설명했어. 국립공원 입구에 분화구를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호텔이 하나 있었대.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그 호텔은 5년 전인가 있었던 폭발 한 번에 완전히 장사를 말아먹었고, 지금까지도 폐쇄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거야. 활화산 주변이라면 당연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걸 조리 있는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들으면 분위기가 달라져. 감정이입하길 좋아하는 우리 인간은 그 순간부터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게 될 거야. 불행히도 난 마그마가 흐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자동차를 운전한다든가, 급히 띄운 배 위에서 바닷물을 만나 식어가는 용암을 보며 한숨을 돌릴 주인공 역할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보단 운석처럼 떨어지는 돌과 불덩어리를 바라보며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을 되뇌는 조연에 가깝겠지. 아름답고도 압도적인 광경에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말이야.


  운이 좋은 밤이면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고 했어. 영업이 끝난 듯한 분화구 중심에 사실 불길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낮엔 햇빛이 진실을 가린다는 이야기였지. 빅 아일랜드에서 가장 볼 만한 광경이라는 가이드의 추천에 나와 두 쌍의 신혼부부는 저녁 식사를 포기하고 도시락을 챙겨 해가 지길 기다렸어. 그런데 해가 저물수록 바람이 강해지더니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야. 야자수와 뜨거운 태양만 떠오르는 하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춥기도 했어. 아침에 게이 커플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산 비닐 우의도 비바람이나 추위를 이겨내기에 역부족이었지.
 
그럼에도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 어두컴컴한 전망대에 다시 올랐어. 그리고 보았어.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는 화산이 지상으로 내뿜는 숨을. 비가 와도 멈추지 않는 지구의 심장을. 푸른빛과 붉은빛이 섞인 그 맥박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초자연적으로 보였어. 만약 지금 화산이 폭발한다면 빛은 하늘을 다 채울 만큼 거대해져서 여기 있는 모두를 단숨에 날려버리겠지. 그런데 다음 순간, 화산의 불길을 보며 가스버너의 불꽃이 떠오르고 말았어. 낮 동안 분화구에서 장작을 피우던 이들이 밤이 되기 전에 신식 문물을 받아들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시시해졌어. 아니, 모든 게 현실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갑자기 감정을 전이할 대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무기력하게 차로 돌아왔어. 오하우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달리는데 세찬 빗줄기가 차창을 때리더라. 앞자리에 앉아 반쯤 잠에 취해 창밖을 보자 문득 어릴 적에 두근거리며 달렸던 비 오는 시골 국도의 풍경이 겹쳐졌어. 안락하면서도 폭우 때문에 마음 한 꺼풀 아래 두려움을 깔고 있던 그때의 심정이 어딘가에서 되살아났지. 저도 모르게 유년의 기억으로 한 걸음. 공항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던 순간까지.


 
애써 이성적이려 해도, 이렇듯 여행은, 언제나 감정이 사방으로 들러붙는 과정. 특정한 벽돌에서, 지나가는 노인의 표정에서, 흙이 묻은 버스의 바닥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는 나. 방어기재를 작동시키지 않은 나 자신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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