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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로 떠나기 전부터 좀 아팠다. 건조한 공기 속에서 여덟 시간의 비행을 마칠 무렵엔 몸살감기도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나와 함께 착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후텁지근한 바람은 기대와 달리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어컨 바람만 곳곳에 매복하여 한 발 한 발 치명적인 총알을 쏴댈 뿐이었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이렇게 앓는다. 상하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올 땐 마지막 날 식중독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고, 팔라우에선 배를 타다가 비를 쫄딱 맞고 만사 의욕을 다 잃었다. 그러고 보면 융프라우요흐에 올라 어르신들도 끄덕없는 고산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몸이 아프면 서럽기도 하지만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피부나 감각이 딱딱한 치즈처럼 둔감해져서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절묘한 예술 작품을 눈앞에 두더라도 감흥이 일지를 않는다. 굶주림이나 목마름, 추위와 피로, 심지어 흡연 욕구 따위에 시달릴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무기력이라고 불리는 불가피하고 압도적인 이름으로 찾아온다.그의 이름 아래, 차라리 집에 처박혀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호텔에 도착해 붓으로 슬슬 쓰다듬는 것처럼 들락날락하는 오한을 종합 감기약 두 알로 꾹꾹 눌렀다.약발이 잘 받을 만도 한데 스물여덟 시간을 깨어있었더니 상태가 나아지질 않았다.
 화려한 열대의 꽃무늬가 그려진 침대는 그냥 벌러덩 누워서 잠을 청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발코니에 서자 습하지 않은 바람이 체로 치듯 체온을 조금씩 빼앗아 갔다. 문득 저녁을 먹기 전에 바다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길을 따라 해변이 있을 만한 곳으로 걸어가는데 물,
 커피, 시원하고 달콤한 것들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ABC 스토어에 들어갔고,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너무나 반가운 순록 로고가 붙은 초록색 병을 보게 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약은 바로 그 병에 담겨있음을 직감했다.
  
감기 기운을 떨쳐내겠다는 의지로
 200mL 짜리 예거마이스터 한 병과 중간 크기의 레드불 한 캔을 집어 들었다. 이것은 열 때문에 머리에 이상이 생겨 저지른 오판이 아니었다. 허브로 만든 리큐어와 식물에서 추출한 고카페인이 함유된 에너지 드링크라니, 재료부터 몸에 유익할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그 둘을 섞어 마시기까지 하는데!
  
이 둘의 혼합물은 흔히 알려졌듯 예거 밤이라 불리며,
 각각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출신으로 하는 두 친구가 한 잔 속에 담기게 된 건 고향의 지리적 근접성으로만 봐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 다갈색의 액체는 상쾌한 칵테일이자 흥을 돋우는 파티 음료이고 동시에 날개를 달아주는 자양강장제다. 그리고 여기 홀로 쓰는 하와이의 호텔 방에선 미열과 피로를 이겨내게 해 줄 말 없는 동반자 역할까지도 겸했다.


  
원래 약을 먹는 걸 꺼리지 않는다.
 몸살 기운이 있거나 두통이 있을 때 물과 알약을 함께 삼키는 게 좋다. 가끔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무거워지고 생각이 둔해지면 부러 두통약을 먹기도 한다. 적당한 진통 효과가 감각 일부를 무디게 만들면서 엮이고 싶지 않은 무의미한 일들에서 물러나 진짜 중요한 대상에 집중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카페인도 좋다. 알코올은 썩 좋아하진 않지만 필요할 때가 있음은 잘 안다. 그래서 왠지 심장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 같은 알코올과 카페인의 조합에도 거부감이 없다. 술과 에너지 드링크를 섞어 마신다고 감기가 나을 리는 만무하지만 시커먼 낙서로 가득해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종이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시차를 무시하고 푹 잠들고 싶었고, 열로 인한 통증을 잊고 싶었고, 딴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당황스러운 외로움을 이겨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작은 취향을 장작불 삼아 낯선 방 낯선 풍경 속에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고 내가 나란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싶었다. 밤에 호텔 방으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컵라면을 안주 삼아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들었다. 십이 층 높이의 발코니에 부는 세찬 밤바람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튼튼해지지는 못했을망정,감수성이 떨어지고 의욕을 잃은 둔감한 남자가 되는 것보단 훨씬 나은 상태로 잠들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음 날도 감기는 다 낫지 않았고 그 다음 다음 날까지도 목이 아팠던 걸로 기억한다.술은 독이 맞았다. 그러나 정신은 취향으로 말미암아 누추한 몸에 끌려다니지 않고 온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며칠 간 아침과 점심엔 감기약을 먹고 저녁엔 복용을 걸렀다가 잠들기 전에 예거와 레드불을 섞어 마셨다. 처음엔 발열을, 다음엔 피로를, 나중엔 외로움을 이겨내는 데 그만큼 효과 빠른 혹사(동시에 호사)가 또 없었다. 무기력해지지 않는 것.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다. 여행에선 마음을 달랠 만한 저만의 아낌없는 취향 발휘가 가장 좋은 처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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