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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에 갔을 때 하필이면
2011 APEC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현지 여행사들은 공항으로 이어진 H1 고속도로와 호놀룰루 시내가 언제 어떻게 통제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초긴장 상태였고, 관광객들은 정상 회담엔 무심한 채 섬이 어서 낙원을 보여주길 기대하느라 바빴다. 걱정하는 무리와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은 무리 사이에서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건 대폭 강화된 경찰력 덕분에 마음 놓고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겠다는 우스갯소리 정도였다.
  실제로 회담으로 인한 불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외곽 도로가 통제될 때는 시내로 들어오는 교통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도로 위에 남겨진 모든 것들이 평소보다 유쾌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하나우마 베이 같은 관광지의 사정은 조금 달라서 종종 해변이 통제되는 일도 있긴 했다. 외국의 귀빈들을 모아 수영복만 입혀 놓음으로써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피부색은 공평하다는 도덕적, 정치적 캠페인이라도 벌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쇼핑센터만큼은 끝까지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았다. 경제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회의를 주최하면서 소비를 향한 신성한 욕망에 흠집을 낼 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들이 머무는 호텔 주변에 무장 경찰이 어슬렁거리고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될 길을 빙빙 돌아가야 하는 사소한 불편을 겪어도 오하우 섬을 사로잡은 이벤트는 피부에 와 닿질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신경 쓰인 일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우리나라의 대통령도 이 섬에 와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한 남자는 정상들의 호텔 입성 때문에 도로 곳곳이 막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MB도 온대요?”
  “내일 온다네요.” 하와이에서 이 십 년을 넘게 산 여행 안내원이자 운전사는 귀중한 손님을 반가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내일요?” 대답을 들은 남자의 말엔 여운이 있었다. "피켓 들고 시위라도 해야 하나."
  짧은 문답을 들으며 검은색 리무진을 타고 하얏트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갈 각하를 떠올렸다. 피켓도 좋지만 날계란을 던지는 것이 더 확실한 의사 표현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야자열매는 어떨까? 머리와 열매가 충돌하는 순간, 남국의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며 단단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타깝게도 호놀룰루엔 야자수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지만 열매가 달린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떨어지는 야자열매에 맞아 죽었던가 죽을 정도로 다쳤던가 한 일이 있었는데, (또는 대리인)가 주정부에 소송을 걸어 엄청난 보상을 받아냈고 그 이후로 모든 야자열매를 다 떼버렸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어쨌든 열매를 키우지 않아도 되는 야자수들은 남아도는 영양분을 무럭무럭 자라는 데 쓸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건물보다 높은 나무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야자열매를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자 하와이에서만 가능할 시위법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어 자못 아쉬웠다.

  
그리고 반년이 흘러 열아홉 번째 총선이 다가온다. 하와이에선 야자열매를 던질 재간도 용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바람에 고개를 젓는 열대의 나무를 보며 상상했던 극적인 장면이 이제 곧 좀 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되려 한다. 하와이에서까지 같은 땅 위에서 함께해야 했던 추억을 되살리며, 비둘기처럼 평화로운 상징으로써, 편지나마 한 장 띄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카에게.

  요즘 참 복잡한 심경이시겠습니다그렇지 않다면 뉴스나 신문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얘기겠죠그래요어느덧 4월입니다저희에겐 중요한 기회가 찾아오는 달이지요그건 가카에게도 마찬가지겠습니다그래도 어엿한 국민이시니까.

  지난 4년 남짓한 기간이 다시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 이번엔 저나 다른 사람들이나 좀 더 신중하게 도장을 찍을 것 같습니다지금껏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 조용히 있어서 잘 모르셨겠지요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공무원이든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는 학생이든 상관이 없을 겁니다아마 많은 이들의 속마음을 동시에 목소리로 듣는다면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귀머거리가 돼버리실 겁니다그 고함이 손바닥보다도 작은 용지에 실려 투표함에 모이고그것이 한꺼번에 열리며 몸과 마음을 울릴 엄중한 메시지로 날아갈 겁니다기대하셔도 좋습니다누가 선동해서도 아니고먹고 사는 게 궁한 원인을 모두 대통령에게 돌리려는 심보도 아니니 사람의 진심이란 걸 좀 이해하고 느껴보려 하세요.

전 경제적인 문제로 각하를 원망하고 싶진 않습니다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박봉을 받으며 살았을 사람이니까요제가 정말 각하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표현의 자유를 참 많이도 침해하셨기 때문입니다전 어릴 때부터그러니까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없을 때부터권위와 독재와 입막음을 참 싫어했습니다표현의 자유란 말조차도 모르던 시절이었죠그건 제 본능이자 의지였습니다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의무와 권리가 어떻게 강탈되는지를 지켜보며 현실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그래요잃은 뒤에야 진짜 소중함을 아는 다른 모든 가치와 똑같이 말이죠참 안 해 보신 것도 없고본심도 그런 게 아닌 분인 걸 아는데 한 나라의 대표가 되는 일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진실은 가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아군이라 생각했던 이들도 제 살 길을 찾아 등을 돌리고 있을 겁니다내년 2월 이후에도 무사하길 간절히 바라시겠지만 참 장래가 어두워 보입니다우리 모두의 앞날처럼 말이죠.

이제슬슬안녕입니다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걸 몸소 체험케 해주신 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머지않아 청문회에서법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재판장에서 뵙겠습니다그때까지 다시 한 번 안녕하시길 빌겠습니다.


희망의 나무가 자라길 바라는 2012년의 식목일에.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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