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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호놀룰루 시내로 들어갈 땐 곳곳에 콘크리트 젠가가 쌓여있는 줄 알았다. 도시 자체가 급하게 성장하고 급하게 지어졌다는 인상이어서 섬 어딘가에 성장 촉진제가 꽂혀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화의 개성이나 건축적 미학보다 실용성과 유용성에 무게를 두는 경향 때문일까. 이국적인 느낌은 팔라우나 로마의 외곽도로, 아니 몇 시간 전 떠나온 인천 공항만도 못했다.



  우선 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어 보아야 차창 너머로는 보이지 않았던 대상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야자수들은 늙고 성급한 도시에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서너 그루씩 옹기종기 모여서 웬만한 건물 높이만큼 뻗어 올라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그네들은 마치 익살스럽게 조각된 토템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세속을 초월한 그 춤사위에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체로 들떠있는 타인의 표정을 보는 것도 산책하며 누리는 즐거움이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뒤섞여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데 불편하지가 않았다. 답답하지도 않았다. 대도시에서 익명의 무리 안에 있을 때 엄습해 오는 피로감이 여기엔 없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 화려한 섬 위엔 삶을 즐길 준비가 된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일까?



  거리를 걷다 보면 도시 속에 있는 건지 백사장을 밟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정장을 입은 사람과 화려한 무늬의 하와이안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 한 식당 안에서 점심을 먹는다. 넉넉한 셔츠와 스웨터, 청바지의 삼종 세트를 입은 사람과 수영복 차림에 하얀 비치 타월만 걸친 사람이 건널목에 나란히 서 있기도 한다. 오직 트렁크와 아쿠아 슈즈만 걸치고 서핑과 일광욕으로 다듬은 단단한 갈색 근육을 드러낸 남자도 거리를 활보한다. 봄과 여름, 여름과 가을의 옷차림이 뒤섞여 일관성을 배척하고, 목적과 기분과 오늘 바람이 부는 세기에 따라 입고 싶은 걸 입고 신고 싶은 걸 신는다. 그들 사이를 헤매고 있자니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장소에 대한 감각이 급격히 떨어진다. 삶이 더 단순해진다. 그게 바로 하와이의 매력인 것처럼.







  낮에는 항상 여름 기온을 유지하지만 밤에는 제법 쌀쌀해진다. 가스로 타오르는 횃불과 백열등의 행렬로 주황빛이 맴도는 밤거리는, 그래서 낮보다 걷기에 좋다.

  오 분마다 한 번씩 보이는 스타벅스보다 더 많은 건 이 분마다 한 번씩 보이는 ABC 스토어다. 정말 많은 사람이 에이비시 스토어의 로고가 새겨진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다닌다. 어떤 도시에 처음으로 가서 마치 그곳에 체류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를 하려면 갖춰야 할 옷차림이나 따라 해야 할 행동이 있다. 하와이에선 그게 바로 이 반투명의 봉지를 들고 다니는 일이다. 막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나서는데 아차, 갑자기 빼먹은 물건이 생각나더라도 돌아들어 갈 필요가 없다. 그냥 일이 분만 더 걸으면 똑같은 품목을 똑같은 가격에 파는 똑같은 매장이 나타난다. 이러한 연속성은 호놀룰루를 양분하는 두 가지 인상의 한 축을 형성한다. 거의 도시만큼 큰 슈퍼마켓이 하나 있고, 우린 도처에 있는 출입구로 같은 곳을 들락날락할 뿐이라는 착각이다. 아니, 섬 자체가 바다 위에 뜬 마트인지도 몰랐다.



  호놀룰루의 또 다른 인상은 쇼퍼들을 부르는 로드샵, 명품 매장, 쇼핑센터들이 책임진다. 옷, 신발, 귀금속, 잡화, 향수, 시계, 그리고 커피와 초콜릿. 섬을 일주하거나 해변에 나가지 못하는 밤을 위해 거리는 조명을 끄지 않는다. 강렬한 비트가 터져 나오는 펍이나 바는 오히려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선 소비가 곧 관광이다. 밤거리를 걷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인생의 목표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가 져도 여전히 해변과 도심의 경계를 허무는 옷차림, 블록마다 늘어선 똑같은 매장과 쇼핑몰, 그리고 쉴 새 없이 머리를 망가트리는 바람이 한통속이 되어 굉장히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왜 이곳이 최고의 휴양지가 되었는지는, 칼라카우아 거리를 걸으며 얼마나 빨리 현실을 잊을 수 있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 보이는 순간. 거의 동시에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 섬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게 무서우리만치 외로워졌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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