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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유럽을 다녀왔을 때 왜 여행기를 쓰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을 거야. 그때의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려는 마음도 있다고 덧붙였을 테고. 아마추어 사진가는 자기 작품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법이거든. 다른 사람도 나의 시선에 동감을 해 줄까? 사진이 그들에게 아주 미세한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을까? 가끔이라도 오, 하는 감탄사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복권 번호를 맞추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기대 때문에 몇 번씩 사진첩을 들추며 괜찮은 놈들을 추렸어.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쓸어담은 글에다가 붙여 넣은 거지.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여행기.

 

  팔라우와 두 번째 유럽 여행 - 출장 - 을 다녀오자 여행만큼 글로 쓰기 좋은 소재가 없다고 대답이 달라졌어.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맞춰 일정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지. 내 식대로 화두를 던지고 싶었던 거야. 그래, 의도는 참 좋았는데 시도는 별로 해보지 못했어. 쓰는 데 진짜 오래 걸리더라구. 여행을 다녀온 날이 멀어질수록 쓰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쓰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고,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날이 더욱 멀어져만 가고. 악순환이지. 그래서 지금은 잠시 멈췄어. 완결되지 못한 그곳의 이야기가 엄청난 부채감으로 남아 있지. 재능의 문제인지 기억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설익은 사고의 문제인지 아리송해. 아마 각각 삼십삼 퍼센트 씩 지분을 나눠 가지고 있을 거야.


 

  그래서 하와이 여행기는 쉽게 쉽게 가자며 시작했어. 시절이 좋지 않아 이번엔 감성적인 글을 쓰고 싶어졌거든. 매일 몇 줄이라도 쓸 거리를 나에게 쥐여주기로 한 거야. 누구도 관심 없는 나의 감정과 고민, 빛에 대한 환상, 섬을 향한 타인의 낭만을 파괴하려는 본능 따위를 원천으로 삼자고 했지. 여기엔 소설도 쓰고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자고 생각했어. 첫 편을 구어체의 편지글로 장식한 이유도 그 때문이야. 하와이를 다녀왔던 2011 11월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그 위엔 똑같이 생긴 일상이 먼지처럼 쌓여가는데, 더 늦기 전에 솔직한 기록을 남기자고 생각했지. 마음 같아서는 여행하곤 상관없는 요즘의 문제들로 가득 채우고 싶어. 가게 앞에 양 머리를 내 걸고 도마 위에선 개고기를 써는 것처럼, 하와이는 그냥 간판일 따름이고 들어가 보면 한 남자의 시시한 이야기가 액자에 걸려있는 거지. 근데 그러자니 하와이 여행기라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하더라. 고급 호텔의 프라이빗 비치에 누워 칵테일을 홀짝이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이잖아. 다들 여행지의 좋은 면을 보고, 멋진 사진을 감상하고,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희망을 키우거나 그곳에 갈 계획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확인받고 싶어하지. 최소한 인터넷에서 파리, 뉴욕, 시드니, 하와이, 홋카이도 같은 단어를 검색해서 누군가의 블로그를 방문할 때는 그런 목적이 대부분이야. 공감을 얻고 위로를 받기 위해 누군가의 글을 읽고 싶다면 서점에 쌓여있는 여행 에세이를 들추지 않겠어? 온라인에선 기가 막히게 싼 숙소나 혀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맛있는 음식, 또는 지갑을 탈탈 털어도 좋을 쇼핑 정보가 인 셈이니까.

  그래도 아직 하와이의 블로우 홀이나 하나우마 베이, 마카푸우 포인트 같은 곳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올리거나 그곳에서의 완벽한 시간을 찬양하는 글을 쓸 생각은 없어. 어느 곳이든 한 번은 접시 위에 오르겠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잡음이 다 발라내지 않은 생선뼈처럼 파묻혀 있을 거야. , 쇼핑센터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쓰고 싶어. 그것은 정보 글이 될 수도 있겠고 나와 당신, 우리 모두를 위한 독려와 질책이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와이에 쇼핑의 낙원이란 타이틀을 붙이는 사람들에겐 주저하지 않고 동의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떠오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한 편 한 편 휘갈기는 여행기. 어쩌면 나에겐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휴식인지도 몰라. 누군가의 오 분을 잠시 내 글에 묶어두게 하고 싶어. 언젠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나면 전 편을 갈무리해서 아이패드와 나의 흑백 리더기 모두에서 읽을 수 있는 이북 하나 정도 만들 수 있겠지. 특별한 주제도 없고 엄청난 문장력을 엿볼 수도 없으며, 심오한 통찰이나 깨달음 같은 걸 담은 글은 더더욱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책장을 훌렁훌렁 넘기며 사진 몇 장, 글 몇 줄,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읽어줬으면 좋겠어. 아마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겠지만 - 만족할 도리 외엔 없겠지만 - 누군가 조금이라도 공감을 해줬으면 하네. 형용할 수 없는 석양이 하필 야자수와 바다 위로 떨어질 때 몰려드는 미칠 것처럼 압도적인 이미지. 그런 꿈 같은 이미지를 거의 매일 볼 수 있는 하와이가 그저 복잡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천국 같은 섬은 아니라고, 그 안에서도 우린 똑같이 화를 내고 슬퍼하고 혼자라고 느끼며 질투하고 욕망하고 비참해지고 미래가 어두워 보이고 옆에 있는 사람이 낯설 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공감해 줬으면 하네.

 

  나는 여행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는 신앙을 믿지 않아. 내가 여행기를 쓰는 이유는 어떤 장소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쓰든 여행의 종교에 반기를 들고 싶어서야. 그리고 그럼에도 또 떠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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