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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되기도 하는데, 책이나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로맨스나 자극을 받은 누군가의 경험담,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먼 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비포 선셋의 만남을 떠올리며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방문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선 데보라 카를 기다리던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세대가 다른 나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찾게 되겠지만).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발상지와 경전 속 일화가 벌어졌을 신성한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하여, 그래서 좀 더 영적으로 풍부한 자신이 되기 위하여 비행기에 오른다.

  그런데 최근 일이 년 동안 나를 유혹하던 장소는 운치가 있다거나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장소라거나 그도 아니면 예부터 관광지로 이름났다거나 한 곳이 아니었다. 완공된 지 십 년은커녕 이제 햇수로 오 년에 접어든 곳.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스칠 법하지만 몇 시간 만에 기억에서 잊어버릴 위험이 도사리는 곳. 그러나 머무는 동안만큼은 희망, 기쁨, 짜증, 분노, 그 어느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모를 무지막지하게 혼잡한 곳. 그곳은 바로 런던의 히드로 공항 터미널 5였다. 



2.

  시리얼이 든 가벼운 도시락을 챙겨 들고 아침 일찍 히드로 터미널 5로 떠났다. 오전 7시 반에 로마로 떠나는 BA548편을 타기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스치는 곳에 지나지 않았지만 단연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곳이었다.

 

  히드로 터미널 5에 대해 알게 된 건 알랭 드 보통의 책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다. 알랭 드 보통이란 작가를 처음 접한 것도 그 책을 통해서였고. 독자들이 일반적으로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여행의 기술같은 책으로 드 보통을 처음 읽게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의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권할 땐 일부러 이 책을 먼저 꼽고는 한다. 이 자리가 여행기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이유는 생략해야겠지만, 어쨌든공항에서 일주일을이후로 모든 저서를 읽으면서 드 보통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게다가 그는 생명의 유한함이란 운명 때문에 더는 글을 쓸 수 없는 다른 훌륭한 작가들과 달리 출간일에 맞춰 나를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고마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체류 시간은 일주일. 한국판 기준으로 분량은 이백 페이지 남짓. 그는 이 아담한 자리에 기대, 자부심, 욕망, 불안, 슬픔, 공포와 소비심리를 골고루 전시해 두었다. 공항에 모인 사람들의 인생은 몇 개의 카테고리로 묶기엔 너무나 다양해서 3M사의 분류표기용 라벨을 한 박스 다 사용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공항에 대한 글은 삶의 여러 부분을 조금씩이나마 두루 건들 수밖에 없다. 공항이라는 전시장을 지켜보며 나도 거기에 한 자리 차지해 진열되고 싶다는 욕망, 누군가 내 삶의 단면을 포착해서 꿈과 불안, 변화에 대한 갈망이나 무기력 같은 테마로 몇 문장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그런 욕구와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실제로 가보는 것 사이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이성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니까.



3.

  터미널 5에 들어서며 처음 든 생각은 어둡다는 것이다. 격자 창으로 들어오는 진한 군청 빛 새벽 어스름이 실내조명까지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히드로 터미널 5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긴 드 보통의 공모자 리처드 베이커의 사진과는 많이 다른 행색이었지만, 이곳 출국장 D 카운터와 E 카운터 사이에 있던 책상에서 글을 쓰던 작가를 상상하니 마침내 올 곳에 왔다는 만족감이 느껴졌다.

  넓적한 아치형 철골구조와 직사광선을 가리는 차양, 그리고 큼지막한 수속 카운터의 알파벳은 어쩐지 인천공항을 떠올리게 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각 항공사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 수도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준은 아니었다. 승객들은 드 보통이컴퓨터가 요구하는 정확한 순서대로 카드와 암호를 집어넣을 수 있는 사용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각주:1]고 했던 자동 체크인 기계를 하나씩 붙잡고 오늘의 이륙을 준비 중이었다. 나도 이 기계에서 셀프 체크인을 했는데 딱 한 번 찾아온 영국 항공의 직원이 (너무나 쉽다는 말투로) 사용법을 알려준 덕분이었다.

  의자에 앉아 처량하게 도시락을 먹은 뒤 다시 한 번 터미널을 둘러보았다. “목적지의 세부 정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초점이 맞지 않은 노스탤지어와 갈망의 이미지들이 흔들리며 떠오르는스크린에는 수많은 여정을 약속하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주로 영국 항공과 아메리칸 항공이 차지한 목록에는 캐세이퍼시픽 항공 같은 아시아 출신들도 가끔 껴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영국 항공과 코드쉐어(한 대의 비행기 좌석을 여러 항공사가 나누어 판매하는 것으로, 편명이 다르더라도 실질적으로 같은 비행기를 탄다.)를 한 손님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번잡하기로 악명이 높은 나머지 네 개 터미널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신식인 터미널 5를 이용할 수 있는 항공사는 굉장히 제한적인 것이다. 그러나 11시 이전에 뜨는 항공편만으로도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곳에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착륙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 그럴 수 있다면 나도 다양한 삶의 면면을 글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4.

  보안구역으로 들어가자 한가하던 출국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침이라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알고 보니 다들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20분 동안 달리 별로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순응하는보안구역엔 수많은 비지니스맨이 비행기 엔진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대부분 양복 차림이었으며 그 때문에 검색대로 올라가는 품목은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재킷과 벨트, 검은색 아니면 갈색 구두와 네모난 서류가방.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물건을 내놓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승객과 보안요원은 모두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검색대 바로 앞까지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특징도 어딘가에 예속된 삶이라는 게 한국인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했다.

  마침내 검색대를 통과하자 인천공항보단 덜 하지만 과연 쇼핑몰을 연상케 하는 면세점이 줄지어 있었다. 아침이라 피곤했고, 뭔가를 살 능력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제대로 문을 연 매장이 거의 없어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곳이 한군데 있었다. 스타벅스였다. 현대 문명이 발달한 그 어느 곳에 가든(이탈리아를 제외하고)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커피 파는 세이렌은 맥도널드와 함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이국의 메신저였다. 외국산 상표가 낯선 장소에서 오히려 친숙해 보이고, 심지어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며 안심하게 하는 세상.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기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트가 열렸다. 자그마한 비행기는 꾸역꾸역 승객을 집어삼키더니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꿈꾸던 곳에 머문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는데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탑승과 이륙 과정은 아쉬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운항기가 많아 트래픽이 심하다는 히드로 공항임에도 모든 게 매끄럽고 양호했다. 그래, 아직까지는.


 

5.

  비행을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기체 결함 때문에 히드로 공항으로 돌아간다는 방송이 나왔다. 내 리스닝 실력의 문제라 생각하고 설마 했는데 선회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정말 히드로 상공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행기는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듯 태연하게 착륙을 시도했다. 지옥 같은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지금 원인을 살피고 있으며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기장의 방송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됐다. 처음엔 비상구 문제로 보였다. 다음은 화물칸에 이상이 있는 줄 알았다. 마지막으로 불운한 새가 빨려 들어가 오른쪽 엔진에 이상이 생겼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모두 기내 안에 돌던 소문이었다). 그 와중에 엔지니어들이 기내로 들어와 비상구를 열고 뭔가를 조사하는 광경을 처음으로 봤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무도 기체 결함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원인을 찾겠다고 기내 안에서 2시간을 넘게 기다리다가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탔고, 거기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승객 대부분을 차지한 영국인과 이탈리아인의 차이점이 눈에 띄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 대체로 덤덤했다. 중요한 미팅을 미뤄야 하거나 로마에 화가 난 클라이언트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이들만 전화통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이탈리아인들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좁은 기내 안을 서성거리고, 우왕좌왕하고, 승무원을 붙잡아 뭔가를 물어댔다. 아니, 사실 국적을 먼저 알았다기보단 행동거지를 보고 편견에 의거하여 대충 때려 맞췄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이탈리아인들은 성미가 급하다는 인식을 뒷받침할 증거 하날 만들어낸 느낌이었다.

  하지만 고성을 지르거나 눈에 띄게 화를 내는 사람, 폭동을 일으키려는 피해자(?) 간의 담합처럼 극단적인 반응은 전혀 없었다.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는 소일로 시간을 때웠다. 이 차분한 분위기는 뭘까.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서 그럴까? 역시 안전을 먼저 생각해서 그럴까? 만약 한국에서 이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6.

  좋든 싫든, 그렇게 오고 싶었던 히드로 공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상황이었다. 바로 그곳이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나는 (격자 창이 인상적인) 터미널 외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혀 있었다. 좁고 건조한 기내 환경도 비행기가 한참 날아다닐 때와 다를 게 없어서 목적지가 없는 장거리 비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건 어떤 장소가 기대와 전혀 다를 때 느껴지는 실망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운이 닥치면 그 어떤 곳이든 지긋지긋해질 수 있다는 우리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문제였다.

  꽉 막힌 도로 때문에 새로 뽑은 차 안에서 분노의 경적을 울려대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밀려있는 회사 일이 연인 또는 친구와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에 침범해 들어오듯, 몇 시간 전만 해도 얼른 오고 싶었던 히드로 공항 터미널 5는 당장 벗어나고 싶은 함정으로 변했다. 완벽할 거로 믿었던 장소와 완벽할 거라 의심치 않았던 상황은 언제든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우리의 감정은 예측하지 못했던,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재난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 나는 나의 기분이 그리는 곡선을 지켜보며 오랜 기대와 상상, 기다림 따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7.

예정된 출발 시각에서 딱 다섯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로마를 향해 이륙했다. 그 기다림 동안 히드로 터미널 5는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고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그저 그런 공항 중 하나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재난을 이겨내는 강력한 처방전, 망각이란 이름의 진통제를 내재하고 있다. 집에 돌아와 한결 편한 기분으로 여행을 돌이켜 보았을 때였다. 다시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펼쳤을 때였다. 나는 내가 본 히드로 터미널 5는 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그날의 실망은 마치 박물관의 외관만 보고 그 안의 소장품을 모두 감상했다 기만하는 것과 같다고 믿기 시작했다. 다음엔 시간을 두고 제대로 방문해야 할 것이며, 그래서 나는 터미널 5에 다시 가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침 올해 말부터 영국 항공이 런던과 인천을 잇는 장거리 노선을 되살린다고 한다. BA로 시작할 그 항공편에 오르면 첫째도 아니고 둘째도 아니고 셋째도 아닌, "현대의 희망에 형태를 부여하는" 히드로의 다섯 번째 터미널에서 입국 수속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에겐 다시 희망을 품을 동기가 충분하다. 또 다른 돌발상황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이미 한 번 겪어봤다는 예방 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자유롭게 착각할 자격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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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큰따옴표로 된 모든 문장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알랭 드 보통 지음, 청미래 발간)에서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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