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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번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적당한 에어컨 바람 덕에 기분이 좋았고, 하차하고 싶을 때 잡아당기면 되는 줄을 보며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손잡이를 당기면 버스 위에 달린 굴뚝에서 나팔 소리와 함께 뽀얀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라도 벨을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충동을 이겨내고 책을 펼쳤을 땐 이미 버스 안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진작 자리를 차지한 나는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읽은 책이 오늘도 흥미로웠다. 이국적인 장소를 탐색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또 다른 이국적인 장소에서 읽고 있자 나 역시 먼 곳에 왔다는 현실감이 선명해졌다.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여행을, 정서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책에서 눈을 떼 차 안을 둘러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얀색 모자를 쓰고 하얀색 나이키 메쉬 티셔츠를 입은 30대 후반의 백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윙크를 했다. 여기선 윙크로 인사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데 놀라며 웃으면서 “안녕”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십 여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으로 익숙한 거리가 보였다. 내릴 정류장이 맞는지 긴가민가하다가 줄을 당길 기회를 뺏기고 말았다. 버스는 아쉬워할 틈도 주지 않고 트레이드 센터 앞에 정차했다. 허둥지둥 내리려는데 남자가 나를 불러세운다. 그는 무어라 얘길 했지만, 내리는 사람들에게 밀려 알아듣지도 대답을 해주지도 못했다.

  도로의 열기가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싹 걷어가 버렸다. 그 남자가 나를 따라 내리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여기 살아?”

  “아니.”

  “여행 왔어?”

  “응.”

  “어디 있어?”

  “저기, 호텔에.” 나는 두세 블록 떨어진 내 호텔 방향을 가리키진 않았다.

  “나중에 전화해.

  남자는 노란색 포스트잇을 건네주더니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종이엔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하자 웃음이 나왔다. 재미있는 건 이게 미리 써둔 연락처인지 - 그래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 아니면 버스에서 급하게 쓴 연락처인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 집필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인터뷰를 한다는 기분으로 그가 준비성이 뛰어난 사람인가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인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묘한 기분은 바로 다음 순간에 밀려왔다.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양성을 통틀어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연락처를 받았다는 데 기뻐해야 하느냐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괜히 입고 있던 옷을 다시 보고, 그가 나한테서 잘못된 끼를 감지한 게 아닐까 돌이키기도 했다. 마치 마구잡이로 섞인 카드처럼 한 벌로 추스르기 힘든 감정이었다.

 

  머리로는 동성애를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진 자신이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상황 앞에선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희곡을 쓸 때도 나를 견인해 주었던 믿음, 한 가지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사랑했었고, 사랑하는 중이고, 결국 사랑하게 될, 보통의 인간이란 사실이다. 대상이 누가 됐든 그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성애든 이성애든 거기에 사랑이란 말 자체가 붙을 수 없었을 테니까.

  돌이켜 보면 그저 지하철에서 누군가 내 연락처를 따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작은 헤프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하얀 티셔츠의 남자가 보낸 윙크와 노란 포스트잇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하고 흐뭇해졌다. 내가 머리로만 그들을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 고맙지만 당신은 제 타입이 아니네요, 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멀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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