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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런던, 밴쿠버, 두바이. 이런 주요 도시엔 오픈 탑 투어를 책임지는 빅 버스가 포진해 있다. 빅 버스에 탄다는 건 "저 관광객이에요."라 쓰인 커다란 전광판을 들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오히려 그게 초심자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여력만 된다면 누가 빨간색 이 층 버스에 올라 도시를 누빌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언젠가 런던에서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빅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생판 모르는 보행자에게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고 환호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모형 자동차 같은 버스 안에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여기 홍콩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D가 빅 버스 티켓 두 장을 얻어 왔던 것이다. 홍콩의 빅 버스엔 총 세 개 노선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택해 하루 동안 마음껏 탈 수 있는 원 데이 패스였다. 덕분에 편하고 저렴하게 홍콩섬 남부까지 구경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정수리를 파고드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이 층 자리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덕을 오르느라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하트를 날릴 힘도 없었고 말이다. 다른 승객은 모두 이 층으로 올라갔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일 층 맨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 말고 일 층에 앉은 사람이라곤 노부부 두 분뿐이었다.

  버스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홍콩섬의 주요지점을 통과했다. 탑승할 때 공짜로 주는 이어폰을 끼우고 한국어 설명을 선택하자 친절하고 박식한 가이드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양 끝자리를 하나씩 차지한 우리는 의자에 늘어져 가느다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휴식과 관광을 동시에 즐겼다. 끔찍한 고통으로 찾아올 것 같았던 자연의 부름도 자연스레 진정됐다. 터널을 지나 섬의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까진 정류장이 없기 때문에 진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만.

  빅 버스 맨 뒷자리에 문이 하나 있었다. D가 그걸 보더니 몇 년 전 런던에서 빨간 버스를 탔을 때의 헤프닝을 이야기해 줬다. 당시 만석이었던 버스에서 맨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그때도 옆에 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을 앞에 둔 인간이라면 자연스레 찾아오기 마련인 욕망에 따라 그걸 한번 열어보고 싶어졌단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을 테지만,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D는 그 작은 문을 열어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시동이 꺼지며 승객으로 꽉 찬 차가 그대로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위급할 때 사용하는 비상문이었던 모양인데 그게 엔진을 멈추게 한다는 것까진 몰라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왜 참극이었느냐면 버스를 몰던 건장한 흑인 기사가 성큼성큼 다가와 D에게 쌍욕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두려운 일이었을지 상상을 하며 나도 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냈다. 급정거를 시키기엔 버스가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랐으니까.

  대화와 휴식을 번갈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홍콩섬 남부의 오션 파크를 지나 리펄스 베이를 거쳐 종점에 도착했다. 높은 건물이 급격히 사라지며 홍콩에서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휴양지의 여유. 우린 스탠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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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간편한 차림으로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해변엔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더 많다. 그들 역시 쇼트 팬츠나 비키니를 입었지만, 공을 들여 만든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꾸민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집이 두툼하게 잡히는 배와 살이 트고 통통한 허벅지가 오후 햇살 아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다. 스탠리는 이 한 장면만으로 여기가 어떤 곳인지 말해주었다.

  화장실부터(!) 들른 다음 갈증도 풀고 당분도 보충할 겸 스낵카에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홍콩에선 뭐든 재료를 아끼지 않는지 진한 버터 맛이 혀끝에 착 감기는 - 그래서 오히려 더 목이 마르는 - 소프트아이스크림이었다. 그걸 천천히 녹여 먹으며 스탠리 마켓 쪽으로 걷자 휴양하러 온 기분이 났다. 버스에서 내린 대부분의 관광객도 우리처럼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들고 같은 곳을 향하는 중이었다. 단순하고 느긋한 목적을 공유하는 조용한 산책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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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마켓은 딱히 뭘 사기에 좋다기보단 별별 상품을 다 보는 맛이 있는 상가였다. 모자와 가방 따위의 잡화부터 옷, 도자기, 그림 액자, 가전제품과 기념품까지 안 파는 게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매장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재래시장을 모티프로 잡은 하나의 쇼핑몰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파에 치이며 좁은 길을 따라갔다. 그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시장을 관통할 수 있는 인내력은 없었다. 어디든 한 군데는 발길을 잡아 끌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통로가 하나뿐이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우리도 적지만 지갑을 열었다. D는 당장 쓰고 다닐 모자와 냉장고 자석을 샀고, 나는 엽서를 몇 장 골랐다. 사람마다 여행 기념품으로 구입하는 게 다르기 마련인데 D는 자석을 모으고 나는 엽서를 산다. 나에게 엽서는 기념품이자 현지에서 쓸 편지지이며, 동시에 일기장이다. 어쩌다 보니 홍콩에선 단 한 장도 쓰질 못했으나 이전 여행까진 매일 한 장씩 꼭 채우곤 했었다. 독자가 분명한 엽서는 여행 노트보다 좀 더 사소한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이고 날 것에 가까운 감정을 기술하기에 좋다.

  엽서를 고르는 데도 취향이 작용한다. 일단 이미지가 선명해야 하며 시간대로는 야경을, 계절로는 겨울을 선호한다. 절대로 내가 찍어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은 풍경은 고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90년대에 포착한 듯한 홍콩의 낡은 이미지 몇 장에 끌렸다. 유행이 한참 지난 패션, 멸종 직전의 구식 자동차, 그리고 전면을 덮고 있는 색 바랜 느낌이 홍콩과 아주 잘 어울렸다. 집으로 돌아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엽서를 꺼내 보면 그 위에 내가 보고 온 것과 내가 보지 못한 것이 뒤섞여 있을 터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조우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보정한 기억과 맞닥트리게 될 터다. 착각이라도 용서가 된다. 지나치게 긍정적이라도 이해가 된다. 여행이니까 그렇다. 아니라면, 우리는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photo by D


  내가 두 사람은 들어갈 법한 커다란 티셔츠도 보고 중국에서 만든 아이팟 용 독 스피커도 구경한다. 어제 디에프에스 갤러리아에서 D가 점찍어 둔 시계도 있었다. 놀랍게도 같은 가격이었다. 고급 쇼핑몰에서든 시장터에서든 이렇게 정찰제(?)가 잘 지켜지는 데 우리는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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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마켓을 나오자 반달 모양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 남부를 연상케 하는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결 인자해진 햇살을 맞으며 돌무지에 올라 바다를 감상했다. 시장의 통로를 따라 전혀 다른 도시, 동남아시아나 지중해에 있는 휴양 도시로 옮겨 온 기분이었다. 부호들이 스탠리에 별장을 짓는 이유를 알 만했다. 그들에겐 전쟁 같은 도시에서 탈출해 심신을 위탁할 방공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퍽 아름다운 방공호가. 결국 아열대 섬이란 환경을 십분 활용한 인간은 홍콩에 휴양지라는 또 다른 역할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바다를 보고 돌아서는데 커플 두 쌍이 평평한 바위 위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래, 이런 것도 휴양지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발 방을 잡아라.

  해변에 늘어선 노천카페 사이를 걸었다. 사람이 많아도 북쪽보다 복작복작하지 않았다. 건물도 달랐다. 똑같이 낡았지만 해풍에 강한 원색 페인트를 덧발라 아련한 항구의 정서가 살아있었다. 시야를 가릴 만큼 높은 것도 없었다. 문득 몇 주 전에 다녀온 카프리 섬과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과 그곳은 시간의 입자가 성긴 분위기를 공유했다. 탈탈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낡은 실외기조차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금세 스탠리가 마음에 들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잠깐 서점에 들렀는데 일러스트와 문구가 익살스러운 컵 받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로 평범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조롱하고 인생을 즐기라는 내용이었는데, 스탠리란 장소와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어쩐지 이곳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알코올 남용에 관한 농담과 진 토닉 찬양으로 디자인된 두 개를 골라 기념품으로 사왔다. 이 코르크 재질의 컵 받침은 여전히 내 책상 위에 나란히 누워 물과 커피와 술잔을 받치고 있다. 종종 컵을 들거나 내려놓을 때 스탠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음에 가면 꼭 더 사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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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있고 싶었지만 센트럴로 복귀하는 마지막 빅 버스가 여섯 시 출발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라 이번엔 이 층에 앉았다막차라 그런지 사람이 꽤 많았지만, 각자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해 원하는 만큼 감상에 젖을 여유는 있었다.

  길고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다시 섬의 북쪽으로 향한다. 스탠리로 올 때 안내 방송이 몇 번씩 이 층에 앉은 분들은 나뭇가지에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러줬었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가로수라 하기도 뭣할 만큼 무자비하게 자란 나무들은 가지치기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몇 번 얻어맞고 나서야 자리를 피하게 됐다.

  얼른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배처럼 버스는 있는 힘껏 달렸다. 바람이 끊임없이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잡스러운 생각이 사라졌고, 기원 모를 자유가 느껴졌다. 바람을 맞으며 자유를 떠올리는 이유는 하늘을 난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린 흔히 눈을 감지 않는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중력에 의한 모든 단단한 연결고리가 조금 느슨해진다. 발밑이 허전하다고 생각될 만큼 우리의 기분은 아주 높이 날아오른다.




  리펄스 베이까지 올라오자 바비큐를 해 먹는 가족들과 비키니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 여성들, 그리고 커다란 리조트와 석양을 볼 수 있었다.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우리가 최고의 시간대에 버스를 탔음을 알 수 있었다. 바다 위로 대형 화물선이 떠다니고, 해안가엔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러 떠난 발자국이 남아있다. 버스가 길게 커브를 돔에 따라 저 앞에 산꼭대기에 있는 걸로 유명한 오션 파크의 그림자가 보인다.




  누구도 급하지 않았다. 급한 건 빠르게 달리는 빅 버스뿐이다. 연다홍색으로 바다를 애무하는 석양의 아름다움에 취해 언젠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꼭 리펄스 베이에서 휴가를 보내자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이제 홍콩의 모든 면을 다 본 셈이었다. 영화에서 보던 낡고 화려하고 빛으로 울렁거리는 홍콩, 유행을 앞서 가려는 사람들의 소비가 극에 달한 홍콩, 첨단 자본주의의 전형을 보듯 높고 세련된 빌딩으로 꽉 찬 홍콩, 그리고 한가하게 비치 체어에 앉아 석양을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서의 홍콩.




  빅 버스가 센트럴의 고층 빌딩 사이로 난 고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와 다른 길로 간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있는 빌딩엔 수없이 많은 창문들이 모눈종이의 격자처럼 박혀 있었다. 주말의 끄트머리를 잡고 불을 밝힌 창문들. 그 안에 진행 중인 우리가 모르는 익명의 삶들. 그 수많은 인생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지켜봤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봤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지만 찰나에 끝나 버리는 아쉬운 만남이었다. 홍콩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이 몇 분간의 프레임으로 하겠다. 너무 빠른 속도와 광량 부족으로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엔 강렬하게,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항상 그러하듯 어느 고화질 사진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다.


photo by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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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감격한 상태로 스타 페리 선착장에 내렸을 때, 내 머리는 완전히 날림 상태였다. 일단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스타 페리를 타기로 했다. 일곱 시가 좀 안 된 시각. 저녁을 먹고 어제 놓친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보기 위해 스타의 거리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것이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에 올라타니 강렬한 디젤 연료 냄새가 십 여분의 짧은 항해를 예고했다.



canon A-1 + 50mm

kodak 100

Blackberry Bold 9900 by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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