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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제외하고 파리에서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일 것이다.

마침 늦겨울의 햇살이 광장 안으로 곧장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자연광과 어우러진 화폭의 색채에 눈이 부셨다.

만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주광의 영역에 있었음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렇게 많은 화가들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 모여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긴 하다.



화가들의 실력이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테르트르 광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품 매장이니까.

그림의 주제는 대체로 관광객인 당신이거나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한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

그 두 가지로 한정돼 있다.

여기에선 뛰어난 예술 작품보단 파리를 기념할 수 있는 뭔가를 얻어가기에 좋은 곳이다.



그럼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보면 경외감이 든다.

"누구에게든 한 가지씩 재능은 있다."는 말을 뒤집어서

"누구에게든 한 가지씩 절대로 갖지 못할 재능이 있다."고 써보자.

나에게 있어 그건 그림이다.

나는 정말로 그림을 못 그린다.

내가 사진에 빠진 이유 중엔 그림을 못 그리는 컴플렉스를 보상받기 위함도 있다.

기억에만 담아두기에 벅찬 장면을 물리적으로도 남기고 싶음이다.



그래서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의뢰인의 초상화를 쓱싹쓱싹 그려내는 화가들이 존경스러웠던 거다.

예전엔 관광지나 행사장 주변에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 뽑아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메라가 보급화되면서 일일 사진가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비슷한 임무를 맡고 있는 이곳의 화가들이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들에게도, 그들에게 상반신을 맡기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이젤 위에 노을이 지는 센 강변을 걸어놓고

유유자적 일본어판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역시

이곳에서 붓을 든 채로 여생을 보내시겠지.

이분이 미술에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진정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테르트르 광장에 나와서 누군가를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또는 몇몇 당신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다들 커피라도 한 잔하러 갔는지 주인 없는 이젤이 많았다.



테르트르 광장에서 내 초상화나 캐리커쳐, 파리의 서정적인 풍경을 가져오진 않았다.

다만 주인이 자리를 비운 그 사이에 살짝, 내가 부릴 수 없는 팔레트 위의 색을 훔쳐왔다.



Leica Minilux

portra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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