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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비껴 반짝이는 우아즈 강변엔 어떤 특별한 장면이 있는 게 아니었다.
조깅을 하는 마을 사람들을 한둘 지나쳐 보내고 나면 다시 찬 바람과 정적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너무나 한가해서 이대로 마을 어딘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늦잠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천박한 간판도 없고 지나친 도태도 없이 오랜 세월 이대로 쭉 이어져 왔을 모습은
우리네 시외 작은 고장이 배웠음직한 미덕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 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공동묘지에 동생과 함께 눕지 않았다면,
이 작은 마을은 이토록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리라.
고흐의 엄청난 팬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의 수많은 그림과 그 만큼 수많은 편지를 보고 읽은 사람으로서
그가 걸었던 길 중 하나를 걷기로 했다.
작은 역으로 이어진 철길 위를 지나며 묵직한 이국의 정서,
다시 말해 내가 지금 멀리 여행을 떠나왔다는 절절한 현실감을 느낀 점에 대해 변명이 하고 싶었다.
당장 서울역으로 가 충정로를 향해 걸으면 똑같다 할 순 없어도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음에도
이곳은 전혀 다른 구조로 틀을 짜고 전혀 다른 재질로 철로를 세워 기차를 달리게 할 거라는 착각을 피할 길이 없었다.
무엇이 나를, 여행자를 그런 자만에 빠지게 하는가.
이곳이 프랑스란 사실이?
프랑스에서도 어떤 정열적인 화가가 최후를 맞이한 작은 마을에 와있다는 사실이?
그저 한 사람의 인생과 선택이 이곳에서 죽음으로 귀결되었을 뿐인데
어떻게 특정한 장소가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리도 평범한 산책길에서 동네 어귀를 걸을 땐 느낄 수 없는 벅찬 만족감에 빠질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이것이 여행의 힘이고, 사람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 멀리 떠나는 이유일 것이다.
처음엔 이런 사치가 굉장히 못마땅하다고, 당신의 생각에 따라 당신이 몇 십년을 산 동네도 특별해질 수 있다고 항변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낯선 장소에 축적된 모종의 에너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니 아무 생각없이 몸과 마음을 시간과 걸음에 맡기고 흘러가게 놔둘 따름이다.
그냥 입 다물고 이 순간을 즐기자고, 나는 그렇게 여행의 자세를 바꾸게 됐다.
주민들이 아직 눈을 뜨지 않은 건지 아니면 벌써 일터를 찾아 떠나가 버린 건지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단체로 소풍을 온 듯한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 서너 명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닐 뿐이었다.
많아도 열 살을 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아이들이 고흐를 알고 있을지,
만약 알고 있다면 그의 그림을 보며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했다.
아마 녀석들의 시선은 내가 상상도 못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겠지.
그게 좀 부러웠다.
내가 아이들을 지나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가장 먼저 한 생각이라곤
"까뻬 드 라 빼? 여기에도 평화 다방이 있군."
따위였으니까.
아무리 신선한 시각을 가지려고 해도 모두 거기서 거기다.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건 다 큰 어른으로선 회복할 여지가 전혀 없는 일종의 권능이다.
어감 참 순수하지 않지만 그런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 힘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있다면 그게 바로 예술가들일테고.
고흐가 머물던 라부 여인숙,
일개 관광객일 뿐인 나는 화가가 무거운 이젤을 짊어지고 걸었을 길 위에서 기대하던 감상에 젖지 못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후
"나는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어."라고 썼던 그의 정신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앞서 고흐가 이곳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알지 못했을 거라 했지만,
사실 그건 틀린 말이다.
고흐가 오기 이전부터 이곳은 화가들이 즐겨찾는 마을이었다.
밀밭과 강 사이에 있는 고요한 마을이라는 점 외에 특별할 게 없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역시 일개 관광객일 뿐인 나는 아이들은커녕 다 큰 어른이 된 예술가의 시선에조차 부합하지 못한 채 그저 걷기만 했다.
그저 그것 뿐. 그냥 흘러가게 놔둘 뿐.
그러다가 나, 여행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에 닿았다.
Leica Minilux
portra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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