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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회

 

  공항과 도심을 잇는 전 세계 공항 철도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 그리고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비싸다는 것. 그들의 도시를 찾은 이가 쉽고 빠르게 시내로 들어와 호텔에 체크인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거나 관광을 시작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가 최신 기술과 미래의 디자인을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공항 철도다. 그런 점에서 홍콩의 에이이엘은 공항 철도의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빠르기는 한국의 공항 철도도 만만치 않지만 감사할 정도로 저렴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실격. 반면 에이이엘은 공항 버스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싼 가격으로 제 권위를 유지한다.

  두 번 타 봐서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철도를 이용했다. 캐리어를 안전하게 넣어둘 수 있는 보관대도, 흠 하나 없는 세라믹 코팅 벽면도, 합성수지로 감싼 적당히 푹신한 좌석도 모두 그대로였다. 단 한 가지, 늦여름에 왔을 때 바깥과 극적인 대조로 나를 놀라게 했던 차가운 실내 공기가 오늘은 평범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열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실내 집기와 다른 승객을 기웃거리자 여기에 홍콩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현대적이고 편리하며 그래서 구성원들이 기꺼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가 집약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누구라도 이렇게 세련된 교통수단을 맞닥뜨리면 저 너머의 도시에 대한 시각을 상향 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홍콩섬의 오성 호텔로 이동하는 사람은 최초의 관점을 계속 유지하게 될 테고, 몽콕이나 침사추이의 낡은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사람은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배신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게 되리라. 마치 나와 D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Y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그는 나와 D보다 오히려 중화권 문화에 익숙하다. 북방의 홍콩이라 불리는 중국 대련에서 꽤 오랫동안 체류했었고, 한자를 보면 현기증이 일어나는 나와 달리 중국어에도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홍콩에 금방 적응할 것 같은 모종의 분위기가 있었다. 앞으로 쏟아질 듯한 낡은 건물도, 마찰을 거듭하다가 폭발할 것 같은 인파도, 현대와 구태가 공존하는 거리의 혼란도 전부 아무렇지 않게 넘기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틀 후, 그가 술을 마시며 털어놓은 고백에서 나의 예상이 모두 빗나갔음을 알게 됐다. 홍콩은 홍콩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 도시를 중국과 완벽히 다른 땅으로 여기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photo by D

 

  다리를 건너 란타우 섬을 지나 칭이 역에 내린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라이킹 역으로 넘어가 한 번 더 환승을 한다. 그러고 나면 호텔이 있는 역까지 쭉 이어진다. 우리는 시내로 진입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고, 한 발자국씩 자신만만하게 그걸 되짚어 나갔다. 칭이 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전엔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일부러 택시 정류장으로 나가 담배도 피웠다. 좋았던 시절만 죽을 때까지 되뇌며 사는 사람이 이와 같지 않을까? 첫 번째 여행에서 경험한 크고 작은 순간을 굳이 오늘에 재현하고자 한 의도는 그것이 지나간 기쁨을 그대로 되살리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류장엔 지난 몇 개월 동안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기다렸던 것처럼 수여 대의 택시가 정차 중이었다. 그런데 데자뷔는 아무런 마법도 일으키지 않았다. 숙취만 생생했다. 여행안내서에서 추천하는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려고만 하는 관습적인 관광객이 바로 우리였고, 우리의 여행안내서는 다름 아닌 작년 여행에 대한 추억이었다.

  딱히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보내고 나면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당시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제 안에서 불러일으켜 동일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와 망각이라는 쌍두마차를 타고 끝없이 이동해야 할 운명이다. 항구성은 인간이 지닌 미덕이 아니며, 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변했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오랜 친구를 속물취급 하거나 아니면 변해버린 자신에게 놀라 인생을 헛살았다고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의 기쁨 역시 마찬가지다. 그 기억이 그대로 재현될 가능성은 술에 취해 다트 세 발을 같은 점수에 꽃을 확률만큼이나 낮다. 낯선 곳에선 놀라울 정도로 예민해지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부풀려 기억될 수 있으며, 같은 장소도 상황과 날씨와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다. 여행 중 느끼는 감정은 우연의 산물일 뿐인 셈이다.

  아주 먼 지평선에 웅크려 있는 먹구름을 보며 한 차례 호우를 예상하듯, 이번 여행이 저번 여행과 같을 수 없다는 예감을 느낀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조바심이 나는 이유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어렵게 잡은 기회의 문제였다. 처음만큼 좋을 순 없다는 편견을 깨고 처음보다 더 깊은 인상으로 남을 두 번째 여행을 위해 우리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 야우마테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내가 가장 많은 신경을 썼던 부분이 호텔이다. 저번 여행에서 지하철역에서 좀 떨어진 호텔을 잡았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사십 여분을 헤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크기가 작은 홍콩 호텔의 특성상 세 명이 잘 수 있는 트리플 룸 찾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 가격, 위치까지 고려하며 검색의 검색을 반복하다 보니 이름만 들어도 그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맞출 지경이 됐다. 그렇게 고운 체로 거르고 또 걸러 결정한 게 야우마테이 역 바로 앞에 있는갤럭시 와이파이였다.

  이 호텔에선 아이폰은 와이파이가 안 잡히겠다는 농담을 하며 구글 지도를 여러 번 확인했었다. 지도상으론 역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야우마테이 역의 출구를 빠져나와 몇 개월 만에 주룽 반도의 혼잡함과 재회하자 구글 스트리트 뷰를 확대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느꼈다. 주인이 삼성전자의 추종자일 것 같은 -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농담 - 호텔은 정말로 위치가 좋았다. 역과 너무 가까운 나머지 제대로 찾아보려 했을 땐 이미 호텔을 지나쳤을 정도였다. 시간을 재 보자. 넉넉하게 이 분? 삼 분? 차에 치이지만 않는다면 앞만 보고 달려서 삼십 초면 지하철역에 도착할 것 같았다. 호텔 잘 잡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도 나 스스로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며 얼떨떨했다.



  계단을 오르자 건물의 뒤편, 거리에선 보이지 않는 일상의 적나라한 단면이 드러났다. 시커먼 에어컨 실외기, 녹슨 건조대에 걸린 낡은 옷가지들, 피라미드 같은 비상계단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의 주인 없는 의자. 가만히 앉아있으면 건너편 창문 너머로 가끔 덥수룩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우린 금세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높은 건물이 방음벽이 되어 주변이 조용했고, 때문에 숲에 온 듯한 평온을 얻었기 때문이다. ‘건물 숲이라는 관용어를 넘어서서 갤럭시 와이파이엔 실로 숲의 정적과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앞으로 로비이자 카페이자 바가 될 베란다를 지나 리셉션에 체크인했다. 사실 리셉션이라고 하기도 뭣했다. 커다란 유리창과 문 하나 있는 작은 방은 호텔을 지키는 아주머니가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 때때로 우리의 요구를 척척 들어주기도 했고 말이다. 갤럭시 와이파이는 호텔의 범주에 넣기도, 모텔의 범주에 넣기도, 그렇다고 게스트하우스의 범주에 넣기도 모호했다. 이곳은 따로 그만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원류를 자처해야 마땅했다.



  안내받은 방은 더블베드 하나와 싱글베드 하나, 그리고 컴퓨터 책상이 겨우 구겨져 들어가는 크기였다. 호텔 이름 대로와이파이도 잘 잡히고 컴퓨터가 있다는 것도 신선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창문이 없었던 것이다. 첫날엔 미처 몰랐으나 다음 날 아침, 창문 없는 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게 된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Y는 숙취를 풀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방 바로 옆에 있는 커피 머신에서 공짜 원두커피(이 점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를 두 잔 뽑아 호텔의 로비이자 카페이자 바에서 D와 담배를 피우며 오늘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로의 머리 위로 홍콩다운 건물이 툭 튀어나와 있는 걸 보는 게 좋았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취향의 사람은 질색하겠지만 - 그날 밤, D Y는 여기서 커다란 쥐를 보게 된다. - 우리 세 남자의 정서엔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정말 홍콩스러운 호텔이야.”

  “, 느낌 너무 좋아.”

  “근데 난 아직도 머리가 아파.”

  난 간헐적인 두통을 호소했지만 습관적으로 흘러나온 소리였을 뿐, 설탕을 넣은 커피 한 잔과 함께 급상승한 기대치는 이미 거대한 기둥 같은 빌딩을 넘어 홍콩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Y가 샤워를 끝냈을 즈음, 우리는 커피잔을 비웠고 허기를 느꼈다.

 

  몽콕에서 가장 세련된 쇼핑몰인 랑함 플레이스가 언뜻 보였기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그곳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호텔 주변엔 용도도 모를 기계나 금속 자재를 다루는 가게가 즐비했다. 차는 좁은 도로로 끊임없이 끼어들었고, 행인은 공사 중인 인도를 빙 둘러 그 옆을 걸어 다녔다. 공항 철도를 탈 때 예감했던 체계적이고 규범이 잡힌 도시의 이미지가 박살나는 덴 몇 분이 채 걸리질 알았다. 혼란. 사람과 기계로 미어터지는 거리는 혼란의 각축장이었다. 이미 지난 여행기에서 수차례 칭송했지만 또 한 번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신을 쏙 빼놓는 이 혼란을 느끼기 위해 홍콩에 다시 왔기 때문이다. 잡동사니에 뒤덮여 표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지러운 책상 앞에서만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책상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도 곧 나를 이해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비유컨대, 홍콩은 자유자재로 책상을 정돈하거나 어지럽힐 수 있는 사상 최고이자 최악의 개인 비서다.



  그나마 나와 D는 한 번 맛을 보았기 때문에 익숙했다지만, Y의 표정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자의 그것이었다. 사실 거의 이틀 이상을 우리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한 Y가 아직도 홍콩이 어떤 지형이고 어디에 어떤 동네가 있는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홍콩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젖어 그의 부적응을 알아차리지 못한 잘못은 나와 D에게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일은 이 글에서도 일어나게 될 일이며, 어느 순간 지금 랑함 플레이스를 향해 걷고 있는 길이 작년에도 우연히 헤맸던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와 D는 더욱 흥분에 빠졌다. 그 자리에 없었던 Y로서는이것들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지들끼리 신 났어.”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랑함 플레이스를 올려다보면 1980년대 위에 이십일 세기가 불쑥 끼어든 느낌이 든다. 길고 탄탄한 에스컬레이터도, 가볍게 유리벽을 지탱하는 철제 기둥도, 화려한 의상과 코스메틱 전시장이 주는 상업성도 이삼십 년의 세월을 너끈히 뛰어넘어 이 자리에 섰다. 낡음, 투박함, 혼잡스러움에 마음이 끌리며 종종 향수마저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환경이 철근과 유리로 짜인 미래지향적인 건축물에 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갖 식료품과 생필품을 한 자리에서 다 구할 수 있는 대형 마트, 극장과 식당과 점포가 혼연일체가 되어있는 복합 쇼핑몰,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새로운 도시를 형성한 주상복합 건물에 우리는 익숙해 졌다. 그러고 보면 다들 소비와 관련된 곳이며, 여가를 보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한 장소에 많은 걸 몰아넣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 그런 건물이 없으면 불편을 느낄 만큼 길들었으나 화려한 총체는 아직 신인류가 되지 못한 많은 사람에겐 버겁기만 하다. 그래서 자신이 나고 자라던 곳을 연상케 하는 - 심지어 반동이 너무 커 실제보다 더 오래되고 낡은 - 촌스럽고 어설픈 거리와 건물에 애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향수는 부재뿐 아니라 과다에서도 비롯될 수 있는 감정이었다.


 

 

:: 라면집

 

  홍콩에서의 첫 끼는 무엇인가?

  “일본 라면이 답이다.”

  랑함 플레이스 푸드코트에 자리 잡은 일본 라면집을 보자마자 우리는 무얼 먹어야 할지 알았다. 여기엔 얼큰한 국물이 있고, 바로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고, 일본 요리라면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음식의 향에 매우 민감한 D, 발 빠르게 그 뒤를 따르는 나, 셋 중 가장 포용력이 있는 Y, 모두가 만족할 만한 선택이었다.



  세 사람이 시킨 메뉴는 각자의 성향을 충실히 반영했다. D는 국물이 매운 라면을 시켰다. Y는 고기 우린 국물 그대로 나오는 기본 라면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계란 볶음밥을 먹었다. 다양하게 시켜서 골고루 맛본다는 개념 자체가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라면과 국물 해장에 대한 선호는 있지만, 그것조차 중화 식으로 바뀌면서 특유의 역한 향이 끼어들지 모른다는 걱정을 한 D아싸리 매우면 그럴 가능성이 적어질 것이란 계산에서 얼큰한 국물을 시켰다. 반면 Y는 어떤 향이 나든 자신이 소화하지 못할 리는 없으리라 자신했고 오히려 기본에 뭔가를 첨가하는 시도가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냥 애초에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국물이 아쉽긴 하지만 두 사람의 요리에 신세를 지면 됐고 - 맛없으면 안 먹으면 그만 - 볶음밥이라면 최소한 평타는 칠 거란 확신에서였다. 이쯤에서 문제를 낼 만하다. 뭔가에 끌려도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면 하든 하지 않든 개의치 않는 자. 본인의 취향을 잘 알고 있으며 미리 정해둔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 하고 싶은 건 해야 하지만 언제나 보험은 들어두고 시작하는 자. , 이 세 명의 인간은 각각 누구겠는가?


photo by D


  “국물이 예술이야.”

  당신이 답을 찾는 동안 D는 우동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연상케 하는 라면 국물을 흡입하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내 거랑 비슷한데 맵네.” Y도 번갈아 수저를 뜨더니 동의했다. 볶음밥은 잘 나가는 메뉴가 아닌지 남들보다 훨씬 늦게 나왔는데 이미 라면 국물 맛을 본 나는 내심 두 사람에게 감사해 하는 중이었다. 구수한 라면이든 얼큰한 라면이든 한 그릇을 다 먹었으면 속이 뒤집어졌을 거란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제일 민감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심지어 적당히 기름에 절어 꼬들꼬들해진 밥알과 짭짤한 계란 고명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남은 여덟 끼를 계란 볶음밥만 먹어도 되겠다며 자신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식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우리가 미식가는 아닐지 몰라도 셋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식단을 고르는 일은 여행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 홍콩에서 나와 D가 즐기지 못한 유일한 낙이 바로 음식이었다. 세상 모든 맛이 다 숨어있다는 도시에서 바로 그 점 때문에 두 사람은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우린 내심 Y가 음식에 대한 도전 의식을 불타오르게 하는 번개탄 정도는 되어주리라 기대했었다. 이 녀석은 뭐든지 잘 먹을 것 같았다. 누린내가 좀 나더라도, 강한 향신료 맛이 배어 나오더라도, 이 정도면 먹을만하다며 우리를 부추겨줄 것 같았다. 편견과 두려움을 접고, 그냥 처먹어.”라고 말해줄 사람 말이다.

  “넌 음식을 책임져, 우리는 관광과 유흥을 책임지지.”

  즐거운 여행을 위해 우린 서로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나눠 가진 셈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함께 여행을 갔을 땐 시작부터 불화의 씨앗이 꿈틀거리다가 흘겨보고 틀어지고 결국 불편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기 십상이다. 우정이나 사랑의 깊이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성실과 배려, 무엇보다 체념이다. 우리에게 성실함과 배려심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체념(좋게 말하자면 합의)이 빠르다는 공통점이 우리를 서로 잘 맞는 여행 파트너로 만들었다. 그건 분명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배가 부르자 마침내 두통이 잠잠해졌지만 몸이 노곤해 졌다. 이대로 호텔로 돌아가 한숨 푹 잤으면 싶었으나 우리에겐 밀린 일이 많았으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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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

Nikon FM2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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