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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이 되면 프랑스는 우기에 접어든다. 특히 북부 지방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파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파리 사람들은 가벼운 비 정도는 그냥 맞고 다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흐린 하늘을 보게 되면 이곳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나갈까 아님 곧 세탁을 해야 할 두터운 코트를 입고 나갈까. 파리에 머물렀던 나흘 내내 날씨가 맑은 적이 없지만, 우산을 들고 나온 이들을 본 적도 없다. 그런 걸 보면 우산은 그들의 가방 안에 숨어있거나 집안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아침부터 비가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우산도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동행인의 우산은 그의 배낭 안에 있었고, 내 것은 한국에 있는 내 방 내 책상 위에 있었다. 어제와 똑같이 흐린 날씨 앞에서 친척 동생은 설마 했던 것이며 나는 짐을 쌀 때부터 방심했던 것이다. 프랑스가 겨울에 우기라는 사실을 안 건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였다. 파리지앵들은 웬만한 비에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말에 속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호텔에서 나와 첫 행선지인 방브 벼룩시장으로 가는 순간에도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의심하지 않았다. 8호선 맨 마지막 정류장인 Balard 역으로 걸어가 3번 트램을 탈 생각뿐이었다. 버스와 트램은 환승이 되지만 지하철과 트램은 환승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두 정거장을 걸어가기로 한 우리는 그 결정에 매우 만족한 상태였다. 이른 시간에 걷는 파리의 주택가는 아주 매력적인 산책 코스였기 때문이다.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과 막 셔터를 올리는 잡화점, 그리고 벌써 개장한 카페 앞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남자까지. 하루를 시작하는 파리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 있고 활기차 보였다. 파리의 아침에 홀려 고단한 하루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파리의 아침.

  방브 벼룩시장은 재래시장과 골동품 시장의 기능을 함께하는 곳이다. 처음엔 생각보다 규모가 작다고 느껴지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아니,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를 건너뛰어 눈앞에 나타난 잡동사니들을 보고 있으면 파리가 얼마나 과거와 가까운 도시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버지 세대가 쓰던 걸 그대로 내다 놓은 중고품들도 있는가 하면 옛날 귀부인들의 손에 들려있었을 법한 거울이나 장신구도 제법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건 수 십 년 전 프랑스 사람들의 글이 그대로 쓰여 있는 엽서였다. 불어를 읽을 수 없어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엽서의 본래 역할이 그러하듯, 안부나 소식, 또는 사랑의 속삭임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의 이메일에 실리는 글보단 정성들인 문장들로 말이다. 그림과 필체가 마음에 드는 것 네 장과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는 한 장을 골라 값을 치뤘다. 그 중에선 1925년이라는 그 해의 년도가 적힌 엽서도 있었다. 장당 1유로씩(가격은 가판마다 다르다) 5유로에 내가 살지 못했던 시대를 공유 받은 기분이었다.

별 이야기 아닐지도.

  그 밖에도 방브 벼룩시장에선 다양한 품목을 찾아 볼 수 있었다. 거의 100년 전 신문이나 사진, 중고 서적, 그림, 장난감, 의류, 잡화, 가구 등등. 그닥 저렴하진 않다는 게 단점이지만 볼거리는 풍성했다. 한국에선 박물관이나 시골집 다락을 뒤져야 찾을 수 있는 법한 것들을 파리에선 시장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하지 과거와 친해질 마음은 별로 없는 우리를 돌이켜 볼 때, 부럽고 또 배울만한 면이었다.

방브 벼룩시장에서 만난 다양한 물건들.

  그렇게 중반쯤 둘러봤을 때였다. 희한한 물건들에 홀딱 빠져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메라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던 것이다. 설마 했지만 다음엔 볼 위로 차가운 게 떨어졌고, 그건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였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후드를 뒤집어쓰자 그야말로 비다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가겠거니 했지만 간헐적이던 리듬은 점점 길어졌다. 내어놓은 물건들에 천을 덮거나 아예 장사를 접는 주인들도 보였다. 가벼운 비도 아니었다. 옷이 젖어 들어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장에서 딱히 비를 피할 곳은 없었기 때문에 걸음만 빨라졌다. 비닐 천막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비구름에 덮여 있었다. 내심 이 도움 안 되는 날씨가 벼룩시장까지만 이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시장의 끝까지 갔다가 큰 도로변으로 돌아오는 길엔 건물의 얄팍한 처마를 따라 걸어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몸이 식어간다는 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것도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는다는 건 대체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여행 중에는 말이다. 낯선 땅에 내리는 비가 어떤 이의 감성을 적실 수도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린 그런 부류에 속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렇다고 경쾌하게 춤을 추며 들고 다닐 우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갑자기 닥치곤 하는 이런 사소한 곤경 속에서, 항상 그렇듯이, 일이 잘 풀리길 바라는 소망은 이뤄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도 일정을 접을 순 없었으므로 다음 목적지인 시테섬으로 향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리자 더 굵어진 빗줄기가 우리를 반겼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좀 마르나 싶었던 패딩이 다시 젖는 건 순식간이었고, 이제는 신발까지 위험했다. 시테섬을 왼쪽부터 돌아보기로 했기 때문에 우린 먼저 생트 샤펠을 찾아 들어갔다. 명소를 찾은 건지 비를 피하는 곳을 찾은 건지는 지금도 확실치가 않다.


  트 샤펠에 대한 기억을 두 가지만 꺼내보라면 첫째는 당연히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고, 둘째는 공항보다 엄격한 보안 검색대다. 솔직히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인상 깊긴 했지만 자칫 생트 샤펠이 무엇으로 유명한지 잊을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 생트 샤펠로 들어가는 보안 검색대는 엄중하기 그지없었다. 하루 전날, 모종의 테러범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이곳의 모든 유리를 부셔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입구 앞에는 검색대 통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운이 없는 이들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비가 내리는 건물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검색대 요원들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관광객들은 별로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은 물론 가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까지 X-Ray 앞에 내놓아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날카로운 소지품은 절대 안으로 갖고 들어갈 수 없었다. 법원 내에 생트 샤펠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누군가 이곳의 멋진 색유리에 흠집을 내거나 아예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러다보니 입장이 더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하는 동안 진짜 꺼내야 할 것들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금속탐지기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그들을 당황케 만들었던 것이다. 나 역시 호텔 카드키와 금속탐지기가 껄끄러운 관계라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한 번 퇴짜를 맞고 커다란 광주리에 카드키만 달랑 넣어 X-Ray 속으로 밀어 넣자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긴 검색대 요원이 나에게 "You're perfect!"라며 엄지를 들어보였다. 괜히 자랑스러워진 나는 마주 웃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가위 때문인가 와인 오프너 때문인가 검색대에서 한참 실랑이를 벌였던 어떤 남자보다는 훨씬 운이 좋았으니까 말이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자 비가 주륵주륵 흐르는 담벼락이 처량하게 서 있었다. 누군가를 면회하기 위해 감옥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생트 샤펠의 내부는 바깥보단 훨씬 호의적이었다는 점이다. 예배당은 2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그 당시 신분이 낮은 이들이, 2층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사람은 꽤 많았지만 내부는 너무나 조용해서 간간히 들려오는 감탄사나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전부였다. 오죽했으면 1층에 쌩뚱맞게 서있는 기념품 판매대를 둘러보는 것도 몸가짐을 정숙하게 갖추고 해야 할 일 같았다.

빗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던 예배당 1층.


  잠시 1층에서 머물다 2층으로 올라갔다. 절로 하늘을 경배하게 될 법한 높은 천장과 사방으로 뻗은 스테인드 글라스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안내문에 따르면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성경의 내용이 그려져 있으며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한다. 그걸 다 감상할 순 없었지만 몇 번이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색을 입은 창을 올려다보는 덴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 옛날, 항상 1층에서만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큰마음을 먹고 2층 예배당에 올라왔다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신분제도에 한탄함과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을 구분 짓는 '눈에 보이는 계급'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들이나 우리나 시대의 유산 앞에 할 말을 잃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린다.

  생트 샤펠을 나와 콩시에르쥬리로 향했다. 생트 샤펠과 콩시에르쥬리는 따로 관람할 수도 있지만 두 군데 모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사면 훨씬 저렴하다. 또한 두 곳 모두 뮤지엄 패스로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어제 산 뮤지엄 패스를 이용했다.

콩시에르쥬리의 입구에 있는 기사의 홀(?).

  이곳은 오랫동안 감옥으로 사용되며 많은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빨아들여 격리시키고, 엄청난 시간이나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르게 했던 곳이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처형당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감방이 주요 관광 명소다. 그 때의 죄수들은 이제 모두 죽고 없지만 공개된 감옥 내부엔 그들의 실물 크기 인형이 대신 수감돼 있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당시 죄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어서도 편한 곳에 눕지 못하니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실제처럼 재현되어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가림막을 두고 그녀의 뒤에서 끊임없이 감시의 눈초리를 휘번득거리는 경비병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지 않고선 못 배길 것이다. 14살의 나이에 이국의 왕세자와 결혼하던 소녀는 아마 이런 결말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형을 세워둔 건 흥미로우면서도, 어쩐지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슬슬 우산을 사야 할 때가 된 것 같았지만 괜시리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오기가 생겨났다. 비도 계속 맞다보니 익숙해졌고, 우산 살 돈이 아깝기도 했으며,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여행이니까 감내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를 안고 비에 쫓겨 시테섬의 또 다른 명소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가자.

  노트르담 대성당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피난처에 온 것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해 졌다. 내부도 인파에 비해선 조용한 편이었다. 불과 몇 발자국을 걸어들어 왔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밖에선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한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추위와 피로를 몰고 온 비도 예배당 안의 아늑한 분위기를 해칠 순 없었다. 저마다 다른 인종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비슷한 안식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

  예배당은 '대성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하게 컸다. 만약 건축에 조예가 있었다면 여기에 한 바닥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도 모자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지금까지 본 많은 교회와 성당들이 그러했듯, 이곳의 공기는 외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유입된 것 같았다. 내부로 스며든 흐릿한 햇빛 위에 떠도는 먼지조차 신성한 몸짓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들도 많았는데 특히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안고 타오르는 촛불의 물결이 백미였다. 그 하나하나엔 누군가의 사연과 기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저 이곳을 스쳐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이곳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간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범위를 조금 더 확장한다면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에 한 번씩 하는 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중 어디론가 여행할 여유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그러모아 가장 경건하게 세상을 축소해 놓은 곳 중 하나일 터이다. 우린 기원의 촛불을 사진 않았지만 엽서를 통해 세상에 한 마디씩 던지는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다시 세상 전체로 퍼져나가면 좀더 살기 좋지 않겠냐는 글이었으며, 지금은 다른 이들의 엽서에 묻혀 그런 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Noel.

  오랫동안 예배당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이번엔 탑을 올랐다. 입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뒤에 서서 상황을 보자 꽤 긴 텀을 두고 일정한 인원만 올려 보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앞쪽에서 입장이 끊겨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바로 뒤에 있던 외국인 가족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물어봐 5분 정도라고 답해줬는데 아차, 그 정도 기다리면 되겠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좀 미안해졌다. 아무리 봐도 그 두세 배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다리면서 한 장.

  차례가 되어 탑 안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왜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올려 보내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전망대까지 이어진 나선형 계단은 정말 무지막지한 높이로 끝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가파르기 그지없었고, 밟아야 할 턱은 수도 없이 많았으며,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속도에 치이지 않으려면 천천히 걸을 수도 없었다. 나중에 가선 하도 빙빙 돈 탓에 어지럽기까지 했다. 앞에 가던 훈남 두 명이 감탄 아닌 감탄을 지르고, 우리도 장난 아니라는 말로 거기에 가세했다. "휘유-" 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번에도 탑을 오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절로 마주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뒤로는 더 많은 탄성, 아니 비명이 쏟아지고 있었다.   
  제자리에 서면 비틀거릴 정도가 되었을 때 전망대에 도착했다. 좁은 성벽로 같은 곳을 따라 걸으며 훤하게 트인 파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너무 흐린 날씨였기에 그리 절경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빗물을 뚝뚝 흘리며 매달린 가고일상의 시선과 하나 되어 바라봤을 땐 흥미로운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의 가고일상을 처음으로 본 건 고등학교 시절 즐겨 들었던 한 앨범의 표지를 통해서였다. 그 당시엔 그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도 모른 채 멋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10년 남짓의 세월이 흘러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그 땐 같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말이다. 여행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엽서나 공책의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막연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신비한 과정이다.

분명 이 가고일상이 더 오래전에 만들어졌을텐데도 그의 시선은 에펠탑을 향해 있었다.

  지모도가 노래를 부르며 등장할 것 같은 종루에 들렀다가(문화의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다시 나선형 계단을 타고 탑을 내려왔다. 추위는 싹 가셨다. 대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지만.


PS.
이번에도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이번편보다 더 짧아서 읽기 편할 '하나 더'를 기대해 주세요.



핑크색 캡션 사진은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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