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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는 데 특별한 목적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싶은 만큼 걸으면 그만이다.

그 와중에 생각을 정리한다거나 추억을 되짚는다거나 풍경을 마음에 기록한다거나 하는 게 가능하다면

덤처럼 누리면 그만이고.



그러니 꼭 가야할 곳도 없었고 꼭 해야할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산책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주 긴 산책을, 그냥 무작정 걷다 쉬다 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어디서 시작할까 하다가 몇년 만에 노틀담 성당에 다시 가볼까 하여 지하철에 올랐다.

출근 시간도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침 햇살이 임시로 짠 나무벽에 부딪히는 질감이 좋았다.

그러나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 위에 붙은 픽토그램은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 산책의 주제도 정했다.


"어느 길로 가야하는가?"


거창하지만 동시에 진부하기도 한 물음이다.

그런데 여기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청동상의 주인공은 저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지팡이를 치켜세운 거겠지?

나도 일단 지금 가야 할 방향은 알고 있다.

노틀담 성당으로!



마침 올해가 노틀담 성당 850주년인 모양이었다.

성당 앞에 거대한 임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전시관이자 앉아서 노틀담을 볼 수 있는 거대한 관람석의 기능을 겸했다. 



성당 안엔 사람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관람객과 순례자들로 꽉 차 있었음에도 내부는 그리 시끄럽지 않다.

실내에서 정숙을 지키라는 경고문이 없어도

성당 안에선 절로 소리를 죽이고 몸가짐을 바로 하게 된다.

그건 의무라기보단 본능이다.


그래도 끝없이 플래시는 터지더라.



주 제단엔 아이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어떤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빽하고 우는 애들도 없었고

모두 얌전하게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종교적 이유보단 성당에 감도는 분위기 덕으로 보였다.



성당은 정말 거대하다.

스테인드 글라스조차 거대하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도 어떤 압도감, 숭고함, 신비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 초를 올리셨습니까.



노틀담 성당을 나와 이번엔 센 강을 따라 걷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팔레 루아얄까지나 갑시다."

"왜요?"

"산책이니까."


햇살은 따갑고 바람은 차갑다.

아직 겨울 티를 벗지 못한 햇살은 석회암 건물을 창백하게 빛나게 했다.

흐린 날씨였다면 너무 아름다운 도시로 변해버린 나머지 울적했졌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관망할 여유가 있다.



강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둥둥 떠다니는 배도 평소보다 가벼워 보였다.

이 시간에 도시 전체가 비어버린 느낌이 들 수 있다니.

서울에선 연휴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걷다보니 퐁 뇌프가 보여 강을 건너기로 한다.



다리 위에서 나처럼 산책을 나온 조그만 친구도 만났다.

쫄랑쫄랑 앞으로 뛰어가다 멈춰 서서 주인을 한 번 쳐다보고,

또 호기심에 못 이겨 쫄랑쫄랑 뛰어가다가 주인을 돌아보길 반복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공포를 느낀다는데

동물에 한해선 좀 다른 모양이다.

나는 조그만 친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주인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귀엽다, 참 귀엽다.



나무 위에서 뭔가를 하는 분도 지나쳤다.

몸을 튼 각도가 예술적이었다.



노틀담 성당과 루브르 박물관 사이의 강변엔 헌 책을 파는 가판대가 줄지어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아드리아나의 일기장을 발견하던 장면 때문인지

괜히 진열된 책을 눈여겨 본다.

나에게도 결정적인 단서가 주어지지 않을까?

예를 들어 파리의 산책 지도 같은.



슬슬 팔레 루아얄, 루브르 박물관이 보인다.

한 번 더 다리를 건더기로 한다.

퐁 뇌프 다음엔 퐁데자르가 있잖아.



파리에서 이름이 기억에 남는 다리가 네 개 정도 있다.

사이요 궁전과 에펠탑 사이에 있는 이에나 다리,

센 강에서 가장 화려한 알렉상드로 3세 다리,

그리고 방금 지나온 퐁 뇌프와 여기 퐁데자흐다.

그 중에서 퐁데자흐가 가장 마음에 든다.


난간을 누렇게 덮은 자물쇠는 여전했다.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하는 연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하나 걸어두고 싶은데,

심지어 옆에 자물쇠를 파는 사람도 앉아있는데,

혼자 걸어둘 수는 없으니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자.



슬슬 오전 산책의 끝이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진 않을 거다.

오후엔 마레 지구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어야겠지만 힘들진 않을 것 같다.

이런 풍경만 계속 마주친다면.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내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지만

파리를 산책하는 시간은 아껴쓰지 않아도 될,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자, 어디로 가시겠어요?"



Leica Minilux

portra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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