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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콰이퐁

 

  샤워를 마치자 살 맛이 났다. 욕실은 하나, 다 큰 남자가 셋. 혼전이 펼쳐질 양상이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한 명이 씻으면 다른 두 명은 술 내지는 커피를 마시거나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거나 그도 아니면 모바일 게임을 한다.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맞춰놓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호텔방이 곧 낙원이다. 그뿐이랴. 편의점에서 탄산음료 컵에 가득 채워 얼음을 공수하고, 토닉 워터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음료도 준비해 진을 즐겼다. 실수로 이 리터나 사온 바로 그 술이다. 술잔을 들고 야외 로비로 나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컵 표면에 이슬이 맺히다가 짤랑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얼음보다 더 시원한 소리다. 파도 소리 대신 자동차 엔진 소리가 공명하는 도시 한복판이라 해도 휴양지가 부럽지 않다.

  이대로 잠들 생각은 없었다. 차례대로 몸과 마음을 환기한 우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선선해서 돌아다니기 좋을 거로 생각했는데,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탓인지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돌았다. 간사하게도 더운 여름이 그리워진다.

 

  야우마테이 역에서 센트럴 행 지하철에 올랐다. 야밤에 놀러 나가는 화려한 차림의 이십 대가 태반이었다. 그냥 여기서 사이킥 조명을 켜고 음악을 틀면 움직이는 클럽이 될 것만 같다.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하다. 센트럴 바로 전 정거장인 애드미럴티 역에서 더 많은 사람이 내리는데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또 다른 나이트 스팟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환승을 하려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여행을 위한 숙제로 남았다.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인파를 경험하며 란콰이퐁으로 이어진 언덕을 오른다. 경찰도 꽤 많이 보였고, 도로도 공사 중이라 가는 길은 번거로웠다. 그렇게 딱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저 눈으로 보면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싶은 란콰이퐁에 도착했다. 거리 전체가 파티 중인 장면을 기대했건만 첫 느낌은 혼돈 그 자체였다. 흥겹게 춤을 추거나 멀쩡하게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보단 단체로 취해 너질러져 있는 이들이 더 많았다. 게다가 어찌나 구석구석 퍼져있는지 서 있을 공간도 없었다. 원래 이렇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저번 여행 땐 열기 속으로 뛰어들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지금은 미적지근한 바닷물에 발을 대는 느낌이다. , 피곤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위기 자체도 썩 매혹적이지 않았음은 확신한다.

  물건을 고르려면 줄을 서야 하고, 그대로 그 줄을 따라 계산까지 해야 하는 편의점에 들어가 술을 골랐다. 급식소에서 밥을 배급받는 기분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은 놀라운 속도로 바코드를 찍고 거스름돈을 돌려줬으나 손님이 밀려드는 속도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만약 당신이 홍콩에서 편의점을 할 생각이 있다면 란콰이퐁에서 밤 매출을 노려보라. 손도 빠르고 셈도 빠르다면 분명 성공할 것이다.

  각자 맥주나 와인 칵테일이 든 술병을 하나씩 들고 천천히 거리를 걸어 다녔다. 클럽에 갈 힘도 없었고 외국인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나는 분수도 모른 채 이 거리에 방종이 만연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럼 여기 있는 너는? 주말 밤에 강남역 가서 사람 많다고 불평할 거면 거긴 왜 기어갔는지 되묻고 싶은 이치와 비슷하지만, 그런 판단조차 가능한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결국 귀에 쏙 박히지 않는 음악 소리와 술주정을 피해 사람 적은 언덕을 올랐다. 술집과 식당이 하나씩 있고 발코니 같은 난간에 서면 눈 아래로 란콰이퐁 거리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자 이상하게도 어느 외국 대학의 졸업식 피로연에 온 듯했다. 물론 우린 그 대학의 졸업생이 아니고 말이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건배를 청한 후 남은 술병을 비웠다. 평균 알코올 도수 오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맥주병 하나. 어떤 이에겐(사실 평상시의 우리에게도) 음료수에 불과한 그 정도만으로도 족했다. 가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리듬에 몸을 흔들다 다리가 휘청이고 나서야 이제는 장렬히 전사할 수 있겠다며 호텔로 돌아왔다.


 

 

:: 아침, 아니 점심

 

  창문이 없는 방이라 문을 닫고 불을 끄면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다는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인 나머지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린 그 사실. 란콰이퐁에서 돌아와 술 한 잔을 더 말아 마시고 동시에 침대에 들었는데 마치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세 명이 쓸 수 있는 방이지만, 싱글 베드 하나와 더블 베드 하나가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 한 번씩 돌아가며 싱글 베드를 쓰기로 했다. 첫날인 어제는 Y였고, 내심 부러웠지만, 막상 더블 베드에 눕자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같은 침대를 쓰게 된 나와 D는 본능적으로 침대의 양쪽 끄트머리에 누웠다. 그런데 서로의 기척이 아주 멀게 느껴질 만큼 둘 사이에 끼어든 어둠은 농밀했다. 시각뿐 아니라 다른 감각까지 멀어 버릴 정도였다. 잠들기 전 이런 생각을 했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겠구나. 그리고 예상은 적중하다 못해 지나치기까지 했다.

  눈을 떴을 때, 필요 이상으로 잤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아 화면을 켜니 정오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있었다. 그런데 방은 밤과 다를 바 없이 어두웠다! 아직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인 것 같은데 머리 위로 이미 태양이 지나가고 있다니. 억지로라도 일어났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면 한밤중에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

  Y가 문을 열자 새하얀 빛이 방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방문 너머로 리셉션의 아주머니가 바삐 복도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방은 벌써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잤으면 상쾌하기라도 해야 하건만 몸에 기운이 없었다. 빛이 없어 수면 유도엔 좋았을지 몰라도 공기가 너무 탁했던 모양이다. 잠은 우리의 시간을 앗았을지언정 피로까지 챙겨가진 않았다.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커피를 내려 바깥으로 나왔다. 소음만으로도 세상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뻑뻑한 근육을 풀고나자 마침내 냉정한 정신으로 여행 전날 마신 술을 한잔 한잔 저주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수 있지?”

  “창문이 없다는 게 이런 건 줄 몰랐어. 완전 암흑이야.”

  사실 다른 방엔 창문이 있었다. 맙소사,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방을 주셨나이까.

  “근데 배고프지 않아?”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동시에 또 다른 욕구가 우리를 부른다. 하긴 뭔가를 먹긴 먹어야 나갈 힘도 생길 테지.

  일단 당장 씻기는 귀찮은 관계로 눈곱만 떼고 호텔을 나섰다. 한가한 숙소 안과 달리 거리는 진작 하루를 시작한 시민으로 북적였다. 우리의 몰골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햄버거 어때?”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는다.

  “편의점 음식?”

  그것만으론 허전하다.

  “그냥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는 건 어때.”

  맙소사, 이 속에 그건 모험이다.

  저번 여행기에서도 수차례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나와 D는 홍콩 음식에 적응을 잘 못 했다. 혹자는 미식가의 천국이라는 홍콩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순전히먹는 데 돈을 별로 안 썼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게 사실이라 해도 서민적인 음식이 맛있어야 진정 요리의 메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현지인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아점을 먹자는 Y의 제안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먹는 데 있어선 Y가 결정을 주도하기로 했고, 그를 미친 듯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녔던 지난밤을 생각해 보면 이번 의견엔 동의를 해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현지 식당이라. 그래, 좋다. 될 대로 되라지. D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영 끌리지 않는 곳에 들어가 아무거나 시켜먹는다는 도전(?)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셋 중 표정이 안 좋은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야우마테이엔 저렴한 현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당이 많았다. 아예 식당만 늘어선 블록도 있었다. 크게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Y는 한 곳을 찍어 우리를 밀어 넣었다.

  길쭉하게 공간을 활용한 실내는 깨끗한 편이었고, 주문 가능한 메뉴는 수십 가지에 이르렀다. 모서리에 달린 TV에선 지금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한국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들로 테이블은 거의 만석이었다. 일단 이곳 사람들에겐 인기 있는 식당이겠다 싶어 안심이 됐다. 그런데 막상 내가 고르려니까 끌리는 메뉴가 없었다. 어제 맛을 들였던 계란 볶음밥조차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간단히 스프링 롤 비슷한 거나 먹기로 했고, D는 카레 덮밥을, Y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있는 차슈가 올라간 국수를 주문했다.

  아직 파도가 치는 위장에 광풍마저 불지 않도록 조심하며 식사를 했다. 실내는 예상보다 조용한 편이었다. 국수 한 그릇씩을 놓고 열심히 먹고 있는 손님들을 보고 있으려니 지금 이 순간, 분식집에서 김밥과 라면을 먹고 있을 고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 자리에 있던 나도 보였다. 저렴하면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팔고, 혼자여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아담한 차림새가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와 있었다. 비록 지금 내 테이블에 놓여있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의 존재는 나를 기쁘게 했다. 아마 홍콩 사람들에게 김밥은 너무 밋밋한 밥 덩어리일 테고 라면은 너무 짜고 매운 국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 나는 위와 혀를 만족시키진 못했지만, 변주된 일상, 겉모습만 조금 다를 뿐 비슷한 기능을 하는 두 공간의 발견엔 만족했다. 수저를 몇 번 뜨지 않은 건 나의 까다로움 탓일 뿐, 이 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 빅 버스를 타자

 

  식사 내지는 식사 비슷한 행위를 마친 우리는 오후 두 시를 넘겨서야 호텔을 나설 수 있었다. 그저 자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하루의 반이 지나버렸으니 얼마나 글로 옮기기에도 쉬운 여행인가.

  큰 그림만 짜놓은 오늘의 계획은 빅 버스 타기다. 일찍 일어났으면 스탠리까지 가려고 했지만 시간상 그건 무리였다. Y가 홍콩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여섯 시까지 침사추이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번 여행 때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홍콩섬도 훑을 겸, 레드 라인(센트럴을 비롯한 완차이, 코즈웨이 베이 등 북쪽만 도는 코스)을 선택했다. 예전엔 빅토리아 피크 정거장을 이용했지만, 이번엔 스타 페리 선착장으로 간다.


photo by D


  센트럴 역에서 내려 일단 IFC몰로 향했다. 길을 잘못 들어 여길 찾아가는 데만도 한참 걸렸던 경험 덕분에 이젠 꽤 익숙하다. IFC몰과 조우하자마자 길을 돌아 이번엔 선착장을 향해 걸었다. 길쭉한 다리만큼 기다란 인파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리 위에서 오른쪽엔 바다가, 왼쪽엔 투명하다고 느껴질 만큼 빛나는 파이낸스 센터의 발목이 보였다. 특히 몰 안에 있는 애플 스토어에서 외부를 향해 걸어놓은 거대한 사과 로고는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쌍둥이 빌딩이 애플 사의 사옥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선착장엔 탁 트인 바다 전망이 있고, 스페인 식민지 풍의 터미널이 있으며, 사진 찍기 좋은 부둣가가 있었다. 우리는 우선 빅버스 승차권을 끊고 출발 시각 전까지 주변을 돌아다녔다.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몸뚱어리도 한낮의 바다 앞에선 흥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마음껏 날뛰라며 우리의 정신을 밀어댔다. 눈앞에 바다가 있는데 절로 치유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는 식으로.



photo by D


  “바다 좋다!”

  전날 스타의 거리에서 느꼈으면 더 좋았을 법한 해방감. 한발 늦었지만 잊지 않고 돌아와 줬구나. 널찍한 시야와 간질간질한 바다 내음이 순수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뜩 신이 났다. 멀리 보이는 주룽 반도의 스카이라인은 어제보다 선명했다. 부둣가에선 기념사진을 찍는 무리, 나란히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 커플, 있는 힘껏 조깅을 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인적이 드물었기에 더욱 반가운 평범한 시민들이다. 또한 다른 곳은 몰라도 센트럴 부근은 신경 써서 도시 계획을 했다는 인상을 받기 마련인데, 선착장 곳곳엔 미처 손길이 닿지 않은 - 심지어 감성적이기까지 한 - 장면이 숨어 있었다. 이끼가 잔뜩 긴 부두, 녹이 슨 계선주, 로켓처럼 생긴 등주와 큼지막하게 쓰인 식별 부호 따위가 그랬다. 일단 만들어는 놨는데 마천루 틈바구니에서 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새로 디자인한다거나 최소한 유지 보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대로 방치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완벽한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허점을 발견이라도 한 듯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까 올해 바다는 처음 보네.”

  “나름 겨울 바다인거군.”

  일몰에 눈이 부시는 휴양지는 아니지만, 이곳도 바다는 바다다. 파라솔 아래 눕는다거나 수영복 입은 사람들을 감상한다거나 하는 혜택은 없다. 그러나 오래된 항구의 흔적을 조금씩이나마 간직한 도시에선 그 자체가 매력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이 순간만큼은 마침내 피로도 잊고 실망도 벗고 부족한 시간에 대한 걱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이제 곧 빅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니, 우린 다시 기대를 안고 여행의 본궤도에 합류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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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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