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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과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상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오하우 섬에 있는 국제공항은 최초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가 세웠다 해도 믿을 정도로 낡았다. 여행의 시작과 종착을 책임지는 역할엔 지장이 없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항은 터미널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라이어티하다. 에이프런에 서 있는 비행기는 또 어떤가. 거대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한 곡선에 혼이 빠져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불만이었던 이유는 출국 심사를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는데 흡연 구역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남은 김에 주마가편, 일부러 더 서둘러서 수속을 마쳤건만 그 흔한 흡연실 하나 없다니! 도심에선 건물에서 육 미터 정도만 떨어지면 나름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볼 장 다 보고 하와이를 떠나는 골초(내가 골초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들을 골탕먹이다니. 덕분에 난 커피를 여러 잔 마신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서점 겸 매점에 들렀다. 혹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을까 했지만,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이 지적했던 대로 공항 서점엔 비행의 두려움을 이기게 해 주는 엑스터시 가득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좀비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온 인류에 대한 보고서나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달콤한 이종교배 로맨스, 또는 온갖 범죄를 해결하는 커리어 우먼들의 모험담이 그 주인공이다. , 그런 소설들을 폄하한다고 생각하진 마시길. 나 역시 재미있게 읽거나 예시를 들 수 있을 정도로 관심 있던 작품들이니까. 문득 지금까지 여행을 가며 챙겨 간 책들이 에세이나 딱딱한 소설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무겁게 가져가 놓고 거의 읽질 않았던 것이다. 모든 걸 털어버리고 나누는 문호와의 대화, 실존에 관한 고민,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하는 숙고의 시간. 처음엔 여행이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신비의 도서관이요, 내면의 토론장이라 생각했다. 물론 완벽한 헛소리다. 여행을 간다고 제복처럼 정형화된 삶의 태도를 벗어던지고 알몸이 될 순 없다. 아직 여행이 방향에 관여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보단 지금까지 유지해 온 삶의 속도에 박차를 가하거나 조금 늦추는, 속도 제어 장치에 가깝다. 그러니 엄한 기대는 버리고, 앞으로 여행을 위한 책을 챙긴다면 꼭 좀비가 사람을 무는 장면이 포함된 걸로 고르자.




  흡연실을 찾아 길고 긴 터미널을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카페에 앉았다. 지난 며칠 동안 하와이에서 쓴 메모를 다시 보며 이걸 어떻게 정리해서 올리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제대로 벌어진 사건도 없었고, 제대로 한 일도 없었다. 항상 이런 벼랑에 몰릴 때면 바라는 게 있다. 제발 사진이라도 잘 나와라. 여행기를 쓴다는 행위는 그렇게 애달픈 희망 사항에서 태어나 미적지근한 삶을 이어간다. 왜 꼭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야 여행이 수정란처럼 나의 기억에 착상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자라서 정확히 무엇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자식이든 예쁘지 않은 이는 없으니까.




  그러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탑승 게이트 앞에 있는 작은 갤러리를 발견했다. 하와이의 역사적인 순간을 묘사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정보를 주기 위한 목적이 분명했음에도 아주 서정적인 분위기였다. 게이트 앞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신혼부부들이 잔뜩 앉아 있었지만, 피로 때문인지 이곳에 관심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덕분에 서방에서 처음으로 하와이 제도를 발견한 제임스 쿡 선장의 모험과 카메하메하 1세의 통일 과정을 조용히 관람할 수 있었다. 섬은 실제로나 그림 속에서나 똑같이 아름다웠다. 처음 하와이에 혼자 오게 됐을 때 느꼈던 근심이 와이키키 해변의 석양 앞에서 모두 증발해 버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나는 하와이를 그린 연작 앞에서 앞으로 종종 이 섬을 그리워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게이트 앞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앉혔을 때, 험한 목소리로 다투는 어떤 신혼부부의 대화를 들었다. 동반자와 함께 걸을 새로운 날들 앞에서도 분노와 실망, 그리고 의도된 상처 입힘은 퍼렇게 선명했다. 앞으로가 걱정되는 두 부부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았다. 환상적인 신혼여행은 아니었지만, 쉬 잊히기 어려운 순간들을 무사히 안고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번이 끝이 아니라 다음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때는 나의 허니문이 될 수도 있겠고, 스릴 넘치는 책을 들고 해안가에 누워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공항에 가기 전에 충분히 담배를 피워두거나 아예 담배를 끊은 몸으로 이곳에 돌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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