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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적 운명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랑에 대한 요구가 선행하고 그 다음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짝의 선택은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테두리, 다른 비행기, 다른 역사적 시기나 사건이 주어진다면,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클로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클로이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실수는 사랑을 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필연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나는 그녀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다. 그녀는 낭만적인 것을 비웃는 데에, 감상적인 것을 배격하는 데에,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고 거리감을 보이는 데에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반대였다. 이상주의적이고, 몽상적이고, 베풀려고 하고, 입으로는 질질 짜는 것이라고 배격하는 모든 것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을 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표시]이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똑같은 순환 패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유동적이면서도, 인간 감정의 고정성에는 그릇되게 집착한다. 그래서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갈라놓는 난해한 분리선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그 분리선은 딱 두 번, 즉 관계를 시작할 때와 끝낼 때에만 넘게 된다는 생각이다. 매일, 또는 매 시간 그 경계선을 넘어서 출퇴근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이나 초등학생들을 폭탄으로 날려보냄으로써 이따금씩 정부로부터 양보를 강요할 수 있지만,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접근방법이 근본적으로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는 시간표가 꽉 짜인 현재의 무자비한 역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 잡게 되었다.

왜 나는 드 보통의 글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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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07 TS 철학자라고 하기엔 가깝고, 소설가라고 하기엔 깊은, 이 유쾌한 사람 덕분에 부대 안에서 저도 많은 걸 느끼고 있답니다.
    우연히 불쑥 찾아와서 사진과 글, 형님의 생각 등 좋은 구경 많이 하고 간답니다.
    잘 지내셔요:)
    2010.04.11 15:50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가깝고 깊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구나. ^^

    군생활 건강하게, 열심히 해!!!
    2010.04.11 22:55 신고
  • 프로필사진 아이텍 책 내용중에 '마시멜로 한다'고 했던 문장이 기억나네요.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굳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도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느낄수 있게 만드는 알랭드보통만의
    유쾌한 통찰력이 참 좋았었어요^^
    2011.06.22 14:11 신고
  • 프로필사진 프린시아 네 많은 분들이 그 표현을 좋아하시더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맨 아래 인용구인 '낙타'이야기가 젤 와닿았습니다. :D

    드 보통의 통찰력도 대단하죠. 불안이나 여행의 기술,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나 프루스트가 우리의... 등 전 저작에서 멋진 솜씨를 보여주죠~
    2011.06.22 17: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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