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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에 관하여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한국은 폭설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가을 날씨인데 말이다. 며칠 떠나있지도 않았건만 미친 듯이 춥고 마구 눈이 내리던 서울 풍경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게 72시간 전까지 현실이었고, 8시간 후부터 다시 현실이 될 그림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꿈을 꾸자. 몇 달 전에 떠나보낸 가을과 일단 재회하고 보자. 마지막 날이랍시고 그나마 일찍 일어나지 않았나. 지금은 아침과 제일 흡사한 시간이 아니던가.

  가방 정리를 하면서 나흘간 너저분해진 기억도 쓸어 모은다. 이번엔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좋지 않았을까. 무엇이 만족스러웠고 무엇이 아쉬웠을까. 여행 계획서를 허투루 썼으니까 여행 평가서라도 제대로 작성해 봐야겠다. 하지 말아야 했던 것과 제대로 했어야 하는 것에 관하여.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에 관하여.

 

  1) 숙취

  숙취란 단어는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함정이었으며, 술을 처음 마셨을 때부터 셈해 봐도 이만큼 강력한 놈은 없었다. 아마 술이 다 깨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딱지 떼서 아문 상처 후벼 파 듯 숙취가 더 오래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숙취에 혼쭐이 나고도 술을 끊을 생각은 없다. 다만 숙취의 주동자로 몰린 막걸리만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다신 마시지 않겠노라는 형벌을 받았을 뿐이다.

  만약 이번 여행에 숙취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판이 완전히 달라졌을까? 아니다. 숙취로 고생한 날 밤에도 술은 마셨고, 기어 다니고 싶었을지언정 가야 할 곳은 모두 들렀다. 이건 이행과 불이행의 문제가 아니다. 흡수와 무감각의 문제다. 감정이 스펀지라면, 숙취는 스펀지를 공장 출고 상태 - 비닐봉지에 진공 포장된 - 로 돌려놓았다. 어느 것에도 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느 것에도 그다지 감동하지 않았다고 하면 솔직한 고백이 된다.

 

  2) 반복

  나와 D는 첫 번째 여행의 감동을 두 번째 여행에서도 되살리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우린 첫 여행에서 엄선한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려 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자리에 앉았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곳을 가고, 같은 곳에서 같은 걸 먹고 마셨다. 심지어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체로 안 좋은 일들이 그랬는데 1항과 어우러지며 우릴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공통된 경험이 있는 나와 D는 첫 여행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감탄사를 남발하며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Y는 공감대를 형성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럴 의지도 없었다. 감수성을 발휘하기엔 1항에 언급한 문제가 우리 셋을 지나치게 좀먹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나와 D 역시 Y의 부적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말이다.

  여행 중간에 고민했던바, 추억은 추억일 뿐 같은 장소에 가서 같은 경험을 한다고 재현되지는 않는다. 그럴 거라고 믿었던 어리석음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속담은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슬퍼져서 후회가 더해진다.

 

  3) 숲 같았던 호텔

  창문이 없는 방이라는 점만 빼면, 우리의 갤럭시 와이파이 호텔은 오성급 호텔 못지않게 걸작이었다. 지리적 위치가 아주 좋으면서 동시에 내부는 숲이나 섬처럼 조용하고 안락했다. 세계 최고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거리를 걷다가 불과 이삼 분만에 인적이 뜸한 공간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게 정신줄 붙잡고 일정을 소화하는 데 퍽 도움이 됐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 곳이 호텔 방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랬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이리도 피곤하진 않았을 테니까.

 

  4)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은셋보다 나은 둘이라고 말했지만, 여행에선 셋도 좋다. 셋은 돈이 적게 든다. 어차피 지출해야 할 비용이라면 셋이 나눠 내는 게 부담이 적다. 셋은 일정을 여유 있게 한다. 한 명이 볼 일이 있어도 나머지 둘은 아쉽지 않다. 셋은 혼자일 수 있어서 좋다. 홀로 이 혼란스러운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건, 그 임시적인 성격 덕에 더욱 매력적이다. 셋은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하고, 다양한 선택지는 여행을 풍부하게 한다.

  게다가 실수로 술을 많이 산다 해도 둘일 때보단 걱정이 덜 하다.

 

  5) 관광

  돌이켜 보라. 우리가 언제 관광을 한 적이 있었던가. 새롭고, 경이로우며, 이국적인 대상을 마주한 기억이 남아 있는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아무도 자기 동네를 관광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석구석 살피지 않아 아직도 발굴할 구석이 많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미 익숙해져 버리는 바람에 신선함을 잃은 우리 동네.

 

  6) 우연

  5항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우연은 진부할 위험에 처해 있던 우리 여행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우연히 발견한 골목과 우연히 들른 식당,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우연은 결정적인 사건을 일으키진 않았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부분에만 관여했다. 기대를 저버리는 상황에 실망할 때면, 우연은 누군가 비타민 한 알을 쿡 찔러 주듯 의외의 기쁨을 선사하곤 했다.

  사실 그 새콤한 맛 때문에 여행을 한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은 다 보게 되는 법이고 하게 될 것은 다 하게 되는 법이다. 계획은 여행에서 의미 있게 살아남기 위한 주요 수단이지만, 그 자체로 미덕이 되진 못한다. 여행에 매료되는 이유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미지의 영역, 달리 말해 사원 밖으로 발설되지 않은 신탁의 존재 때문이다.

  나도 모를 깜짝 놀랄 사건이 있으리란 기대에 혹해서 여행을 가는 사람은 없다. 우연은, 그것이 고삐를 쥐고 있는 의외의 기쁨은, 항상 무방비 상태에 있는 우리를 방문한다. 때로는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신속히 잊히기도 하고, 때로는 뭉뚱그려진 기억 속으로 편입되기도 한다. 빅 버스 투어보다 인상 깊었던 페리 터미널 선착장엔 "홍콩섬에서 보낸 행복한 시간"이란 명찰이 붙었다. 침사추이를 헤매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던 일식집의 장어 덮밥은 홍콩에서 먹은 모든 끼니의 대표 음식이 됐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선 맛있는 걸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너츠포드 테라스의 라이브 클럽도, 마카오의 포르투갈풍 카페도 그랬다. 우리가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서 찾은 행운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를 찾아온 거다. 우연이란 이름으로. 의외라는 조랑말을 타고.

 

 

:: 연착

 

  호텔 아주머니가 큰길로 나가면 바로 공항 버스 정거장이 있다고 일러주셨다. 지하철과 공항 철도를 타는 게 좀 더 빠르긴 하지만, 비싸기도 하고 환승이 귀찮기도 한 참이다. 캐리어를 끌고 네이선 로드로 나오자 과연 정거장이 코앞이었다. 첫날, 지하철역에서 일 분 거리에 호텔이 있다며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반대로 떠날 때가 되니까 너무 가까운 정거장이 아쉽다. 언제 또 올지 모를 이 도시에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하고 간다는 생각이 들어 도망자가 된 기분이었다.

  월요일이다. 홍콩은 우리를 잊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했다. 우리도 내일 아침이면 죽을 만큼 피곤한 상태로 하루 늦게 한 주를 시작할 것이다. 일상은 멀어질 때보다 훨씬 빨리 돌아올 것이다. “충전 완료! 잘 쉬고 잘 놀았으니까 다시 힘내서 살아 보자!” 이 순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고 싶다. 그리고 얼굴을 익힌 다음 영원히 멀리하고 싶다.



photo by D





   버스 안은 추웠다. 강한 에어컨 바람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창밖으론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홍콩의 풍경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가 보지 못한 건물과 거리와 하늘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 걸까?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각기 다른 방법이 있다면, 도시의 경우엔 그곳의 구석구석까지 훤히 꿰뚫고 있을 때 사용권이 주어진다. 그 사용권은 기억 회로나 추억 지도 안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며, 불현듯 도시의 일부 또는 전체가 떠오르면서 그곳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하고 지금 있는 장소를 그곳처럼 느끼게 하는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도시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수반한다.

  고개를 돌려 보니 D Y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나 역시 피로가 몰려 오는데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진 않았다. 아니, 깜빡 잠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의 기억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첫날 도심으로 향하며 품었던 기대가 강렬하고 일관돼서 (숙취에도 불구하고) 날처럼 선명했다면, 마지막 날은 모든 게 흐리멍덩하고 뭉툭해서 서로 구분이 되질 않는다. 아쉽거나 안도하거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거나 아니면 좀 더 우리를 붙잡는 뭔가가 있었으면 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속이 안 좋거나 커피가 마시고 싶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거나 커피 한 잔을 꼭 했으면 싶거나 했을 텐데 그 모든 게 한 덩어리로 뭉쳐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항에 도착하자 떠나기 싫은 마음을 알았는지 출발이 지연된 상태였다. 눈이 워낙 많이 와서 인천 공항에 내리는 비행기들이 연착됐기 때문이란다. 고향이 거기서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오라며 준 말미를 감사히 받았다. 느긋하게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고, 퍼시픽 커피에서 커피를 마신다. 카페는 정말 안락했다. 자리에 앉으면 첵랍콕 공항의 물결치는 철골 천장과 유리 벽이 전경에 등장했다. 나는 노트를 펼쳐 둔 채 멍하니 앉아 있었고, D는 인터넷을 했다. Y는 다시 잠에 빠졌다. 우리는 대화도 많이 하지 않았다. 정말 조용했다. 다른 도시로 가는 주요 경유지이자 수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공항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언뜻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꿈은 비행기에 올라 인천 공항에 도착해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농도가 짙었다. 만약 쉽게 깨지 않는다면, 일상이 떠날 때보다 훨씬 늦은 속도로 돌아온다면, 우리의 다음 한주, 우리의 다음 한 달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무실에서 화면을 움직이기 위해 의미 없는 휠 스크롤을 한다. 누군가 뭘 물어도 한 박자 더디게 대답한다. 상사들이 정신을 어디다 놔두고 다니는 거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다른 친구들은 여행이 그렇게 좋았느냐고 부러워하거나 비아냥거릴 테고, 나와 D, Y는 술자리에서 이번 여행에 관해 왁자지껄 떠들다가 갑자기 침묵을 지킬 터이다. 누군가 “언제 또 갈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모든 게 헝클어져 평범한 하루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의든 타의든 이젠 꿈에서 깨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사실은,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 본 적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할 일은 다 했고 즐길 일은 모두 즐겼다. 이건 이 꿈에서 조금 늦게 깨어도 좋다는 신호가 아닐까? 늦잠을 자도 된다는 일종의 승인이 아닐까? 결국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다면, 에라 모르겠다, 차라리 마뜩잖은 현실을 바꿔버리자. 식어도 커피가 맛있지 않은가. 비행기가 뜨려면 아직 멀지 않았나. 이번 꿈은 언제까지 꾸어야겠다고 미리 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대로 좀 더, 자연스레 계속될 때까지 즐기기로 했다. 그 꿈은 홍콩하고 상관이 없는 환상인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홍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행의 동반자 D와 Y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며.



canon A-1 + 50mm

portra 160


Nikon FM2 + 50mm by D

superia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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