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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이야기하자면, 베르사유 궁전 안에 들어가진 않았다.

두 해 전에 갔던 그곳은 내부도 정원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거울의 방은 얼마나 화려했던가. 정원은 또 얼마나 숲처럼 시야 끝까지 내달렸던가.

그러나 그걸 기억하면서도 다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저 밖에서, 카페 같은 데라도 앉아 있고 싶었다.

하늘이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서. 그냥 남들한테서 날 좀 떨어뜨려 놓고 싶어서.







좀 더 정확한 이유를 대자면 여기까지 오다가 보았던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두 젊은 여자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베르사유 대학에 다니는 듯,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어떤 모퉁이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껏 이 자리에서 수없이 오갔으리라는 걸 짐작하게 할 만큼 익숙한 인사였다.

이제 한 여자는 계속 가던 길을 가고,

한 여자는 모퉁이에 있는 집 안으로 발길을 돌려 쏙 들어가 버린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파리의 낡은 아파트와는 조금 다른,

우리나라로 치자면 공동 현관문에서 카드키를 찍고 들어가는 다세대 주택이었다.


나는 그들의 동행과 이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담 너머 안식처를 따라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그녀의 삶이 불현듯 궁금해 졌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에 관해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의 평범한 사람이 보내는 일상과 그리 다르지 않을 타지의 일상이

역사책에도 등장하는 왕과 왕비, 왕족과 귀족의 삶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그녀가 궁금해 졌다.

그녀의 음악 취향이 궁금했고, 그녀가 말하는 방식이 궁금했으며,

그녀가 치마나 바지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그녀가 요즘 인터넷으로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인지가 알고 싶었다.

 

아마 이런 궁금증은 그녀가 아니었어도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마침 그녀가 언제든 주인공이 교체 가능한 상황 속에 있었을 뿐이다.

물론 그녀가 아닌 였다면 호기심이 훨씬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도 평생 들어가 볼 일 없을 어떤 집,

그 안에 똬리를 튼 미지의 삶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런 호기심은 불순한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의 하루, 지나간 한 달, 앞으로 남은 일 년을 알아간다는 게

종종 밀려오는 고립감을 이기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기보단 앎과 알아감이 마땅히 그러하게 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손가락에 생채기가 나면 본능적으로 입안에 가져가듯이.


 



 


누군가는 역사가 현재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역사를 일컬어 새털처럼 가벼운 무엇이라고 했다.

그날 나에게는 두 번째 화자가 대화를 시도한 모양이다.

부도덕한지는 몰라도 무능했음엔 분명한 왕과 왕비도,

계몽된 민중이 다 함께 들고일어난 결정적인 혁명도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다.

 


 




그보단 광장에 모인 사람 태반이 어느 날 저녁 마주할 무력감과 외로움을 상상하며

반쯤 잠든 머리로 나는 그걸 어떻게 지우고 있나 되뇌는 시간이 더 좋았다.

그래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았느냐 찾지 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 자신 보기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

그저 인종도 국적도 언어와 문화도 다른 이들이

나와 같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리라는 상상이 주는 위안을 즐겼다.

그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에겐 허약한 연대감과 공감대가 생기는 거니까.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아름다운 이유는

만약이 일어났을 때 분명 뭔가가 달라지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만약 내가 모든 걸 내던지고 이 도시에 정착하기로 한다면,

모퉁이 집으로 사라진 그녀처럼 이곳에서 일상을 꾸려 나간다면,

가끔 그녀 또는 그녀와 대체 가능한 수많은 타자를 스쳐 지나간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될까?

그래서 흐릿한 뭔가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한 그 장면.

생판 모르는 사람이 모퉁이 집으로 들어가던 그 장면.

아직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알게 해 준 그 장면.

그래서 돌이킬 수 없기 전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넘겨 봐야겠다고 다짐하게 한 그 장면.


좋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파리 시내를 걸으며 썼던 여행 노트에 다시 한 번 풀자.

여기선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일어난 작은 불꽃이

현재의 날 만든 부싯돌 비슷한 거였다는 결론만 살짝 언급하자.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찍은 사진 폴더를 꽤 오랜만에 열어봤기 때문에

모퉁이 집을 그리며 궁전 앞을 서성일 때 찍은 사진들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나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사진이

내 하드 드라이브에 숨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모퉁이 집 앞에서 두 사람이 손을 흔들며 헤어지던 장면이

내 머릿속에 느리지만 선명한 영상으로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이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늘의 난 무엇을, 누구를, 누구의 삶을 궁금해 하고 있을까?

 



Leica Minilux

portra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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