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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을 돌이키다보면 작은 순간도 크게 느껴지곤 한다. 특히 좋은 기억은 남고 나쁜 기억은 잊히는 경우가 많다.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제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항공기 좌석표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똑같은 공식을 적용하여 베네치아에서의 둘째 날을 열자면, 그날의 나는 베네치아에서 눈을 떴지만 전날의 베네치아에 있지 않았다.


  파리의 호텔에선 제공받지 못했던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의 등장은 하루의 시작을 경쾌하게 열어줬다. 밀가루 위주의 탄수화물 식단에 단백질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고, 조리하는 모든 과정이 인터넷 레시피에서 '쉬움'으로 평가받는 요리의 경우라면 특히 감동이 더하다. 호텔 식당엔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우리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접시 위에도 노랗고 불그스름한 요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 밤엔 빈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모든 짐을 꾸려서 나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 로비에 캐리어와 배낭을 맡겼다. 저녁에 들렀다 가야한다는 불편이 있었지만 유료 보관소에 맡기는 것보단 이편이 돈도 안 들고 안전해 보였다.

맥도날드 앞에 선 용사들.

  아침에 보는 메스트레역은 전날보다 훨씬 생동감 있었다. 잿빛 콘크리트가 쌓아 올린 무심한 거리는 오고가는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로마 광장으로 가기 위해 2번 버스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노란 차체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저 상자를 타고 불과 십여 분만 달리면 이곳과 체계가 전혀 다른 도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졌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오랜 시간을 날아와야 바다 위에 도시가 떠있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막상 거기에 살지 않으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 어떤 이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십 여분을 간다 해도 바다는커녕 강줄기도 보지 못하는 곳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여행이 끝나고 나면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조건들에 감사해야 할 위치에 놓인다는 점이다.

심통난 할머니.


  쁘게 로마 광장을 지나 산타 루치아역까지 걸어갔다. 오늘의 일정은 무라노와 부라노섬을 돌아보고 야간열차를 타기 전까지 베네치아에서 시간을 보내는, 길지만 단순한 동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 앞에 있는 Ferrovia 선착장에서 바포레토 DM 라인을 기다렸다. 활짝 펼친 바포레토의 노선도는 얼핏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대도시의 지하철 노선도에 비하면 훨씬 미적이었다. 섬 이곳저곳을 연결하는 색채의 순환을 따라가노라면 엉뚱한 노선에 몸을 실어도 언젠간 제자리에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얻으며 마음이 편안해 진다. 베네치아의 골목에서 길을 잃어도 노란 표지판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듯이.

바포레토 노선도입니다.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어요.

  배는 시간을 지켰다. DM 선에 올라 아침 햇살 아래 처음으로 베네치아를 보았다. 전날 느꼈던 적막함은 물에 풀어 넣은 양 희석돼 있었고, 작은 화물선에 과일을 싣는 사람들이 월요일 오전 10시 30분의 베네치아를 대변해 주었다. 전날 이 물의 도시를 포위했던 관광객들은 소수의 이방인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베네치아, 오전 10시 30분.

  바포레토는 베네치아 북단의 좁은 운하를 지나 섬의 외곽을 타고 돌았다. 거친 질감의 벽돌로 세워진 건물들이 섬 가장자리를 따라 줄지어 선 모습은 들쭉날쭉한 성벽 같았다. 이내 그 모습도 멀어지고 우린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 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물에 뜬 도시를 본다는 흥분 때문에 여기서 바다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햇볕에 익은 백사장이 없다고 해서 바다가 강이나 호수가 되는 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맞던 바람은 갑자기 짠 내가 나는 해풍으로 변했고, 오랜만에 입은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은 행운과 비슷한 기쁨을 느꼈다. 그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청록색 물결을 향해 크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배 안의 몇 안 되는 승객 중 절반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소심한 감탄만 그 자리를 대신했다.

  뱃머리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조타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엔 이 배의 조타수이자 항해사이며 동시에 선장이라고 불러야 할 남자가 있었다. 그는 젊었고, 보잉 선글라스 아래론 일부러 면도를 꼼꼼히 하지 않은 턱 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 바다만 응시했다. 그의 눈앞에는 수 십 여개의 부표가 일렬로 늘어선 뱃길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배가 무라노 섬의 선착장에 닿자 그는 진지한 얼굴을 벗어던졌다. 그는 굵은 밧줄을 나루의 말뚝에 감아 배를 고정시키더니 활짝 웃으며 승객들의 하선을 도왔다. 한 할머니가 그의 부축을 받아 무사히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선착장에 나와 있던 다른 직원은 원래 잘 알던 사이처럼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600여대의 수상버스를 소유하고 근 3,000명의 직원을 고용 중이며, 한 해 평균 1억 8천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는 이 거대한 대중교통 회사도 작은 섬의 선착장에선 한없이 친근해지는 셈이다.

훈훈한 옆선.

  한국 관광객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선착장인 Colonna에서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정거장인 Faro에서 내리기 위해 조금 더 배에 머물렀다. 나중에 부라노 섬으로 갈 때 탈 LN 선이 Faro 선착장에만 멈추는데, 후에 다시 찾아오기 쉽도록 위치를 익혀두라는 인터넷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작은 섬을 조금 빙 둘러 가나 싶더니 어느새 배는 이물을 돌렸다. 커다란 등대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무라노 Faro 선착장.

  라노 섬 안쪽으로 들어가는 넓은 길은 베네치아를 축소해 놓은 시골 풍경 같았다. 간혹 이 섬의 거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지나다닐 뿐, 거리는 한산했다. 유리 공예품으로 유명한 섬답게 중간 중간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있었지만 손님은 없고 라디오 소리만 빈자리를 메우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쓸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가하다고 해야 좋을 풍경이었다. 낡은 문들은 겨울 햇살에 몸을 덥히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세월에 낡고 단단해진 돌담은 어릴 때 지나쳤던 그곳인 마냥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아무 걱정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며, 그러다가 때때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체감하기 위해 몇 미터의 순롓길을 걸어 광활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 누구나 그런 낭만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도 금세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라노 섬

  딱히 관광명소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보단 지문이 잔뜩 묻은 유리창에 달라붙어 한참 시간을 보내거나 작은 수로를 따라 걸으면서 이런 곳에 살면 어떨까 상상하기 좋은 곳이었다. 섬의 중심쯤에 오자 유리 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점점 많아졌다. 이 모래의 후손들을 보고 있으면 몇 세기 전, 베네치아가 얼마나 화려한 도시였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저것을 귀에 달거나 목에 걸면 어떨까. 공산품으로 가득한 부엌에 저런 우아한 단지를 하나 놓으면 어떨까. 그런 욕심은 공예품 옆에 수줍게 앉아있는 가격표를 보면, 그래서 유로에 환율을 적용하여 우리나라 돈으로 가늠해 보는 현실적인 계산을 거치고 나면 이내 사그라지기 마련이지만 그 누구도 꿈꾸는 대가까지 요구하진 않는다. 
  또, 유난히 많은 애완견도 무라노 섬의 매력 중 하나였다. 섬 이곳저곳에서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강아지(라기보다는 개)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종도 크기도 제각각이었지만 한결같이 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좁은 섬 안에서 마주치는 동물들 덕분에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두터워졌다. 호기심이 많은 녀석, 땅에 코를 박고 이방인의 흔적을 쫓는 녀석, 주인 옆에 달라붙어 점잔을 빼는 녀석 등 다양한 성격을 만날 수 있었지만, 특히 어느 가게 앞 공터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큰 개가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는 길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세상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도 잠시 그 옆을 지켰다. 몇 분 정도 기다리자 누군가가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녀석은 때가 됐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지금껏 주인이 장을 보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달하지 않고 주인의 부재를 지키는 모습에서 현명함과 충직함이 느껴졌다. 문득 나도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도도하고, 활기차고, 과묵한 그들.

  정오를 넘기자 밝고 부드러운 햇살이 섬을 적셨다. 땅은 온기를 품었고, 수로는 거울처럼 빛났다. 우리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곳곳을 누볐다. 옷가지를 파는 간이 시장을 지났고,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노란 초등학교를 보았으며, 섬의 끝에서 바다와 조우하기도 했다. 쿠키향 가득한 베이커리에서 목을 축일 물 한 병을 사고, "그라지에 밀레"라는 말 한 마디 덕분에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작은 여자아이와 인사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한참 전에 지나갔던 조깅하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우리는 원래 유리 박물관을 볼 생각이었지만 뭐가 문제인지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고, 종국엔 찾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리는 좀 고달프더라도 마음은 한없이 느슨해지니 여행이란 바로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되는 것. 낯선 곳에서 낯익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고 그것을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 무라노 섬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유난히 노인이 많은 섬이다. 그러나 그것이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배 시간에 맞춰 Faro 선착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갑자기 둘 다 용무가 급해지는 바람에 안절부절 하다가 카페 겸 바를 찾았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어르신 몇 분은 아예 술잔을 들고 나와 길에서 대화를 즐기고 계셨다.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에 넘쳐흐르는 두터운 친분과 왁자지껄함 속에서, 우리는 잠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레몬 탄산수 한 캔을 사고 태연하게 화장실을 이용했다.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우리도 이곳에서 본 강아지들처럼 순한 표정이었을까?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


PS. 다음 편은 부라노 섬으로 이어집니다~


핑크색 캡션 사진은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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