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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날, 우리는 갈 곳을 정해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어디로 갈지 정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탠리로 가자! 그게 다였다. 결정은 삼 분도 안 돼서 끝났다. 대신 첫 번째 여행처럼 비싼 빅버스를 타지 말고 일반 버스를 타자는 데 중지가 모여졌다. 그게 훨씬 싸고, 좀 더 빠르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수도 없이 트램을 지나쳤는데 왜 이건 타지 않았을까. 창문이 다 열려있어 더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미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노선을 알아봐 둔 우리는 느즈막이 일어나 타임 스퀘어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어제 완차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타임 스퀘어 바로 앞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스탠리 행 버스 정류장을 향해서였다. 우리가 머무는 코스모 호텔 바로 옆에 터널이 하나 있는데 빅버스처럼 그곳을 통과해 홍콩섬 남부로 내려간다.







  어제 하루 돌아다녔다고 이제 타임 스퀘어 가는 길이 익숙하다. 확실히 홍콩섬의 아파트먼트들은 몽콕의 그것에 비해 정돈되고 깔끔한 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종로의 낡은 건물과 강남 지역의 낡은 건물 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더 우리의 취향에 들어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몽콕의 빌딩보다 덜 압도적인 건 사실이다. 간판으로 인해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지만.







  타임 스퀘어 주변은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하긴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길가에 앉아 물건을 파시는 할머니들도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아는 사람이고, 반가운 마음에 잠깐 짬을 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장면은 너무 사소한 나머지 특수한 상황이라 여겨지기 쉽지만, 오히려 보편적일 때가 더 많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개념이 내 안에서 뒤집어지는 걸 느끼는 재미가 여행엔 있다.







  한 택시 기사 아저씨의 영업용 차량이 말썽인 모양이다. 나는 차도 없고 운전도 서툴고, 그래서 자동차에 관심이 전혀 없다. 그래서 보닛을 열어 뭔가를 점검할 줄 아는 사람은 특별해 보인다. 그게 멋있어 보인다거나 부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가 막힌 칼질로 국수 다발을 만드는 칼국수 장인에게 느끼는 놀라움에 가깝다고나 할까.







  버스 정류장 주변의 좁은 골목은 한창 연극이 진행 중인 무대 뒤편을 닮았다. 여기엔 온갖 소품과 의상과 화장품이 나뒹굴고 있고, 벽 너머로 공연의 소음이 먹먹하게 들려온다. 숨죽여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나 있는 곳이 극장 밖 세상과도, 극장 안 무대와 객석과도 접점이 없는 사각지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자유로움이란!







  우리가 탈 버스는 40번 미니 버스였는데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모퉁이를 돌아 건물의 두 면을 끼고 이어져 있을 정도였다. 보통 이럴 때 나와 D는 일정을 포기한다. 우리는 뭔갈 기다리면서까지 하진 않고, 그게 일종의 룰이다. 그럼에도 맨 뒤에 섰던 이유는 버스가 무진장 자주 왔기 때문이다. 여러 대가 동시에 들어올 때도 있었고, 한 대가 지나가면 거의 바로 다른 한 대가 뒤따라 오기도 했다. 이 버스에 배차 간격이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요에 따라 즉각 공급을 맞춘다는 느낌이랄까? 과연 홍콩다웠다.







  그런데 버스 줄과 겹쳐진 또 하나의 줄이 있었다. 국숫집 줄이었다. 이 줄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더 길어 보이기도 했는데, 식당 이름이 뭐였더라…. 누들 유니버스였나? 여튼 그런 이름이었다.







  대기 예약을 위해 점원과 고객이 이야기 중이다. 몇 명인지, 앞에 몇 팀이나 있는지 서로 묻고 답하는 것 같았다. 나와 D도 여기서 먹어보자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럴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위치는 기억하고 있으니 다음 여행이 있다면 꼭 가보려 한다.







photo by D


  줄이 점점 줄고 있다. 스탠리로 가는 사람 대부분은 커다란 비닐 백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그 안엔 수영복, 수건, 물놀이 도구 등이 들어 있었고, 옷차림도 대체로 가벼웠다. 한여름이다. 휴양지 느낌 물씬 풍기는 바닷가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건 이 빡빡한 도시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리라. 나와 D도 수영복을 사서 물놀이를 할까 했지만, 참았다.






photo by D


  D가 찍은 사진인데 의미심장하다. 막다른 길에 들어선 듯한.

  우리 차례가 돌아와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 스탠리로 달렸다. 미니 버스이다 보니 좌석이 꽉 차면 입석 승객 없이 바로 출발시켰다. 남자 한 명에 여자 셋인 젊은 일행이 우리 옆에 있었는데 다들 이미 수영복을 입은 채로 그 위에 겉옷만 걸치고 있었다. 하긴 이곳이 만약 하와이 같은 곳이었다면 그냥 수영복만 입고 버스에 올랐겠지. 바다와 면한 도시엔 분명 서울에선 느낄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있다. 그게 부럽다. 나도 바다와 가까운 사람이었으면 좋으련만, 일단 물놀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photo by D


  사십 분 조금 안 걸려 스탠리에 도착했다. D와 나 둘 다 이 표지판을 찍었는데 D의 사진이 훨씬 좋아서 가져다 붙였다. 바다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바다 특유의 짠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미 첫 여행 때 스탠리 마켓을 섭렵한 우리는 그냥 바다와 사람 구경 좀 하다가 밥을 먹기로 했다. 돌아다니지도 말고 그냥 한 자리에서 여유롭게 노닥거리자고 말이다. 휴양지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무위가 아니겠느냐며.







photo by D


  이곳은 수영을 할 수 없는 쪽 해변이다. 스탠리 마켓 바로 옆에 있는 이 해안가엔 테라스 식당이 줄지어 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놀러 온 사람들의 국적이 다양하고 뒤편으론 채도 낮은 파스텔 톤 건물도 보여서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심지어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요리도 맛있다.

  "좋네."

  "좋아."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몸안으로 한가로움이 젖어 들어왔다. 나와 D가 홍콩에 자꾸 다시 오려한 이유 중엔 분명 이곳, 스탠리도 있었다.




Leica Minilux

portra 160

 

Nikon F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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