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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는 뜨지 않았지만, 더위도 같이 숨은 건 아니었다. 종종 약한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며 습도는 한계치를 향해 내달렸다. 바다는 불쾌지수를 배출할 거대한 해방구였으나 무지막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진 못했다. 해풍, 해풍만 우리를 조금 위로해 주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제일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소금기에 바랜듯한 건물 외벽의 색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여름이 갑자기 감당 가능한 장애처럼 느껴졌다. 집과 사무실과 카페와 대중교통에서 지금껏 너무 습관적으로 "더워 죽겠다."라고 투덜거려오지 않았던가. 그건 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피상적인 대화를 메우기 위한 공용 비밀번호였다. 습관적인 인사, 누구나 알고 있어서 유출할 필요조차 없는 패스워드. 우리는 더위에 공감함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미있고 솔직하고 유용한 화제를 생각해 내느라 머리 아플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더워 죽겠다."를 반복하다 보니 내가 정말 더위에 죽어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름 동안 살인적인 더위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그건 기가 막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낭비였다.







  도대체 우리가 여름 나절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 아니, 그것이 비단 여름만이겠는가. 봄도 가을도 겨울도 그렇고, 성과를 내야 하는 분기와 모임 많은 한 달과 야근으로 점철된 한 주도 그렇고, 당장 눈을 뜨고 감아야 하는 오늘 하루도 그렇다. "더워 죽겠다." 류의 습관적 감상은 마치 공식에 의해 도출된 답처럼 다른 부수적인 것, 잊힌 것, 틀리다고 의미 없는 건 아닌 것들을 무시하게 한다.

  이번 여행 내내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아마 그렇게 흘려버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랬으리라. 나는 시원하지 않은 바다를 보며 여행하는 시간을 소중히 하는 만큼 평소의 하루를 소중히 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해 보았다. 그 시간조차 아쉬워 생각은 단상에 그쳤다.







  이제 구경을 좀 하자. 스탠리엔 스탠리 마켓이 있는가 하면 스탠리 플라자도 있었다. 둘 다 뭔가를 사고판다는 기능은 같지만, 재래시장과 쇼핑센터라는 형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옛것과 새것의 공존이라 부르기는 좀 뭣했다. 두 공간이 나란히 있는 이유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영백복門迎百福. 이 문에서 온갖 복을 다 맞이하시길. 아니,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곧 나의 복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기엔 손잡이에 걸린 자물쇠가 지나치게 단단해 보이지만 말이다.







  공간이 사람을 이국적으로 만드는지 눈이 파란 이들이 공간을 이국적으로 만드는지 아직도 모호하다. 이국적 정취를 느끼는 과정이 일종의 동경에 의해서라고 한다면, 나는 파란 눈 사람들을 동경하는 것일까? 도대체가 그러지 않는다는 게 확실한데도 본능적으로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동양인이고, 내 주변 모든 이들도 동양인이고, 일본인이나 중국인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음에도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나는 서양인이 아니고, 아무리 한국에 많은 관광객과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이 오고 간다 해도 서양인이 우리 주변에 희박한 편이라는 건 사실이고, 그래서 저 사람을 미국인인지 유럽인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낯설지 않은 건 아니라 한다면, 결국 그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느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공간 위에 독특한 정서를 덧입히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그 결론이 조금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다. 내가 서구의 도시에 살아 보고 싶은 이유엔 그런 이질감을 거세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그다음에는 인도의 어느 도시, 그다음에는 태국의 어느 도시, 그다음에는 어느샌가 낯설어진 고향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지.







  홍콩의 스탠리도 분명 외국임에도 "외국 같다."는 헛소리를 찍찍거리다가 피자 익스프레스라는 레스토랑에 앉았다. D는 피자를 좋아한다. 나도 피자를 좋아하는 편이다. 알고 보니 여긴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어떤 식당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먹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D의 신기한 능력 덕에 우리는 이곳을 선택했다.







  테라스 자리에 앉아 해변 도로를 걷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채 이곳에서 변죽을 울리다 서로 멀어지고 있을까? 검은 원피스를 입은 사람, 짙은 군청색 반바지를 입은 사람,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카메라 줄을 목에 걸어 고난의 길을 선택한 사람, 크림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든 사람, 마시던 물이 입가를 살짝 벗어나 작은 물방울이 턱밑에 괴어 있는 사람. 한참 동안 그걸 모르다가 나중에야 손등으로 그걸 스윽 닦는 사람. 만나도 만난 게 아닌 그 많은 사람들.







  우리 뒤에는 모녀와 사위가 앉아있었다. 중국 본토 사람인지 홍콩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꽤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고, 그들 테이블로 날라지는 음식을 보며 우리도 우리의 메뉴를 고대했다.







  맥주를 시켜 마시는 동안 드디어 우리가 주문한 피자 두 판이 나왔다. D는 할라피뇨가 올라간 피자를, 나는 연어가 올라간 피자를 선택했다. 연어가 토핑이라니! 연어를 아주 좋아하는 나로선 저 분홍색 살점만 모두 걷어내어 먹고 싶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훈제가 아니라 살짝 느끼한 감이 있었지만. D의 피자가 더 매콤하고 맛있었다. 사실 난 연어보다 할라피뇨를 더 좋아한다. 그래도 이왕 먹는 거 한국에선 본 적 없는 연어 피자를 먹고 싶었던 거다.






photo by D


  피자를 앞에 놔둔 채 서로 찍은 필름을 정리하고 맥주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D가 말한다.

  "이게 바로 진정한 휴가인 거 같아."

  식비를 아끼고 아꼈던 첫 번째 여행과 달리 이번엔 식도락을 좀 즐기자는 데 둘 다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피자 익스프레스는 좋은 선택이었다. 술집에 갈 돈으로 - 홍콩은 술값이 비싸다. - 이렇게 사람답게(?) 살자고.

  "휴양지에 온 기분이야."

  나는 의자 팔걸이에 기댄 편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제부터 셈해 봐도 딱히 우리가 뭘 보거나 체험한 게 없다. 앞선 두 번의 여행 동안 관광객으로서 할 일은 다 했으니 세 번째엔 그냥 되는 대로 즐기는 게 맞았다. 그리고 스탠리는 휴양지의 나태함이 아주 적절한 비율로 감도는 마을이었다.







  식당은 우리가 스탠리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피자 조각을 뜯어내며 대화와 흡연, 셔터 누름과 멍한 응시를 반복했다. 우린 언제 돌아갈까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photo by D


  당신이 스탠리에 간다면 이 테라스 거리 중 한 곳엔 꼭 들러보길 바란다. 경비에 맞춰 음식이든 음료든 주류든 꼭 하나씩 들고 앉아있길 바란다. 그때 우린 서로 옆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뒹굴다 피자 익스프레스에서 나온 우리는 예전에도 갔던 스탠리 마켓의 한 서점에 들러 엽서와 블록 달력 등 이런저런 걸 샀다. 그리고 해수욕이 가능한 쪽 해변에도 들러 맨발로 백사장도 밟아 본 다음,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친구도 만났다. 꽤 독특한 매력을 지닌 녀석이었다.






photo by D


  코즈웨이 베이로 돌아가는 40번 버스 정류장에는 그리 길지 않은 줄이 있었다. 그런데 올 때 와는 달리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역시 수요에 맞춰 공급을 조절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긴 기다림이 지루하진 않았다. 오히려 버스가 오고, 버스가 스탠리를 떠나 리펄스 베이를 지나쳐 홍콩섬 북부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울 따름이었다.




Leica Minilux

portra 160

 

Nikon F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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