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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 란콰이퐁에서 신나게 마시다 들어온 관계로 오늘도 거의 정오가 다 되어 눈을 떴다. 홍콩의 아침을 보지 못하는 건 이젠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일이랄까. 홍콩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다 눈여겨 볼 부분을 하나 추측하자면, 아침 일찍 공원에 가면 태극권을 하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는 안내가 아닐까 한다. 일단 나도 그랬으니까. 그땐 몰랐다. 아침에 공원에 가는 부지런함이 나에겐 얼마나 요원한 일이었는지.




  공중 정원에 가 하늘을 올려다 보니 날이 많이 흐렸다. 사실 지금까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 여정 내내 홍콩에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봤었기 때문이다. 금요일부터 온다는 비가 토요일로, 토요일부터 온다는 비가 일요일로 미뤄져 마침내 먹구름이 꼈다. 수중전(?)을 각오했던 우리로선 감사해 해야 할 일이었다.







  첫날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구도로 찍었던 사진이 있다. 호텔을 나설 때의 습관인 모양이다.

  정신을 차린 후 일단 나갈 준비를 마치긴 했지만, 사실 마땅한 목적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내 콘택트 렌즈나 사러 가기로 했다. 올해 초에도 갔던 침차수이의 미라마 쇼핑센터로 말이다. 거기 가고 나면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젠 호텔 앞 고가도로도 익숙하다. 처음엔 어디가 인도이고 어느 길이 지하철 방향인지도 몰랐지만, 어느새 저 거대한 조형물 너머로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알지 못하는 길 위에서 미래를 그릴 순 없는 노릇이므로.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지만, 일을 하던 점원이 잠깐 뒷골목으로 피신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







  처음으로 코즈웨이 베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침사추이로 올라갔다. 특기할 게 없는, 마치 주말을 맞아 나들이 가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마치 우리의 도시라도 되는 듯 말이다.







  침사추이 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정장을 입고 손에는 주상복합 고층빌딩의 팸플릿을 든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뉴 테리터리 같은 신도시에 있는 곳 같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땅값 비싼 도시에서 저런 곳을 분양받을 수 있는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번에 찾느라 고생했던 미라마 쇼핑센터 홍콩 옵틱에서 무사히 일회용 렌즈를 사고, 잠깐 실내를 돌아다녔다. 저 마카롱 같은 의자를 들고 오고 싶었다. 의자에서 단내가 날지도 몰랐다.







  잠깐 맑은 날이 왔다. 흐린 하늘이 호우를 준비하느라 잠시 무대 뒤로 숨었고, 빈자리가 이를 놓칠새라 청명하게 빛났다. 하지만 습도가 더 높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아직 제대로 끼니를 해결하지도 못해 많이 피곤했다. 렌즈를 금방 사는 바람에 할 일도 없어진 우리는 잠시 미라마 주변을 떠돌다가 너츠포드 테라스에나 가보자고 했다. 낮에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너츠포드 테라스는 최소한 저녁 이후의 시간을 위한 골목이 맞았다. 인적이 거의 없고, 식당이나 바들도 영업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젯밤 잠깐 들렸을 때와는 딴판인 광경, 마치 파티가 끝난 홀의 적막함을 닮았다.







  밤에는 제법 운치가 있는 골목인데 낮에는 어찌 이리도 자리를 잘못 잡은 사람처럼 어색해 보일까. 맥주 광고의 젊은 모델들도 푸른 공허를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다. 어제 밤새도록 술자리가 이어진 골목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한 것도 이상해 보였다.






photo by D


  그렇다. 일요일 오전에 서울 중심 유흥가를 가보면 밤사이 벌어진 전쟁의 상흔이 거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어지럽게 널린 쓰레기, 누군가의 토사물, 가끔은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까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일요일 낮의 너츠포드 테라스엔 밤의 증거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들 취하지 않을 만큼만 술을 즐겨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주 부지런한 미화원의 손길이 이른 아침에 이곳을 쓸고 지나간 것일까.







  너츠포드 테라스를 빠져 나와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방황했다. 이곳엔 한국 음식점이 많아 '코리아 타운'이라 불러도 좋겠다. 여름, 수분기 넘치는 일요일 오후, 깨끗하게 거세된 사람의 흔적.







  메뉴만 보아도 군침이 도는 반가운 음식 이름을 보았다. 갈비찜엔 느낌표 한 개, 삼계탕엔 느낌표가 무려 세 개나 붙어있다. 이곳의 추천 메뉴가 무엇인지는 그걸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떠나온 지 삼 일만에 향수병에 걸릴 일은 없지만,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익숙한 언어로 예감한다.




Leica Minilux

portra 160

 

Nikon F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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